진공관 프리앰프 프로젝트 [3] ㅡ IC로 프리앰프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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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관 프리 제작기에 웬 IC? 네 가지 이유로 IC 프리앰프를 먼저 만들게 되었다. 첫째 이유 - 앞 기사에서도 언급한 것 처럼 역 RIAA 필터가 과연 실동작 시 얼마나 정확한지, 또 시정수를 미조정하는 데 얼마나 유용한지 확인. 두 번째 - IC로 어디까지 할 수 있나 테스트. (장차 고급 오피앰프를 써서...)세 번째 - 진공관 프리를 평가할 스탠다드가 필요함과 동시에, 진공관 회로로 IC 회로를 특성상 능가할 수 있는지 보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보다 현실적이고 긴급한, 그러니까 진짜 이유 - 진공관으로 프리를 만드는 것은 오래 된 꿈이고 또 단단히 마음먹고 시작한 프로젝트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얘기다. 부품 조달도 단번에 되지 않는다. 몇 달이 걸릴 것을 예상하고, 시청해 가면서 이리저리 조정하는 데는 일 년이 걸릴 지 모른다. 만드는 것도 재미있지만... 그 동안 어쨌든 음악을 들어야 하지 않는가?

TR로 제대로 만들려면 진공관으로 만드는 것 보다는 덜하겠지만 제법 품이 들 것이다. 그래서 익숙하고 수월한 IC로, 우선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만들게 된 거다. 최근 IC도 많이 좋아졌다고 해서, 최대한 이것저것 바꿔가며 소릴 들어볼 수 있도록 만들고자 했다. 우선은 손에 익은 아날로그 디바이시즈의 AD712와 AD826, AD811을 써서 만든다 - 712는 오디오 전용으로 개발된 놈이지만 나머지 둘은 오디오용이 아닌데, 특성상 별로 흠잡을 데가 없기도 하고 뭣보다 이미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요즘 많이들 쓰는 버브라운의 OPA604나 OPA132를 꽂아 써 볼까 한다. 아날로그 디바이시즈의 AD797이나 버브라운 OPA627도 생각이 있지만 비싸서... 특히 OPA627은 손톱만한 오피앰프 하나에 2만원이 넘는 가격! (흔히 쓰는 TL081은 개당 천원 정도 한다. 제법 비싼 712도 3천원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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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앰프를 사용한 라인앰프 설계는 그리 복잡하지 않지만 op-amp로 좋은 소리를 내려면 좀 궁리를 해야 한다. 아래는 간단해 보이지만 보기보다는 얘기할 게 많은 회로이다. 아날로그 IC 쪽으로 익숙한 사람이 한 번 척 보면 이게 어디서 베낀 건지 당장 알 것인데, 유명한 월트 정의 버퍼 회로 디자인을 갖다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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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단이 유니티 게인의 버퍼로 동작하는 것은 보면 알 터이지만, 피드백 거는 법이 독특하다. 일반적으로 유니티 게인 버퍼를 쓰는 경우 증폭을 담당하는 초단 오피앰프는 최종 출력에서 피드백을 따 오게 된다. 이 회로에서는 네스티드 피드백이라고, 각각의 오피앰프에 독자적인 피드백을 걸고 다시 전단 피드백을 거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이런 복합 피드백은 상당히 위험한 기술로, 사용하는 오피앰프가 고성능이고 또 안정한 특성을 지녀야 한다는 제한이 따른다. 물론 AD826이나 AD811은 이런 점에 전혀 문제가 없고, 사실 이렇게 구성해서 쓰도록 만들어진 앰프들이다.

복합 피드백의 장점은 대단히 넓은 대역에서 낮은 왜곡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초단 오피앰프가 독자의 피드백 라인을 가짐으로써 전체 회로의 게인 정수와 무관하게 가장 특성이 좋은 정수를 잡을 수 있고, 또 버퍼와 전단 피드백을 통과하기 전에 오디오 대역을 커버하는 출력 대역폭을 저왜곡으로 송출할 수 있다. 대역이 이미 충분히 넓은 신호로 전단 피드백을 드라이브하기 때문에 최종 출력의 왜곡이 낮아지는 것이다.

후단의 버퍼에는 비디오 버퍼로 쓰는 AD811을 사용했다. 이 오피앰프는 버퍼용으로 널리 사용되는 고성능 IC인데, 오피앰프로서는 꽤 우수한 100mA의 대전류 용량을 자랑한다. FET 입력으로 엄청 낮은 입력 오프셋 전류를 지니고, 따라서 직류 피드백 없이도 DC 커플링이 가능하다. 우수한 노이즈 특성은 물론이고 이상적이라는 커런트 피드백 방식을 채용하고 있다.Burr-Brown의 BUF 라인 칩들도 좋다고 한다. 대단히 비싸긴 하지만 버브라운의 OPA627은 약간 낮은 전류 공급 능력 (80mA) 을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AD811 보다 우수하고, 거의 믿을 수 없는 성능을 보인다... 아직 써 보지 않아서 소리는 어떤지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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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로 포노 EQ 설계하는 것은 약간 더 까다롭다. 앞의 기사에서도 썼지만, 오피앰프 하나로 저역에서 천 배까지 증폭을 하려면 디스토션이 상당히 많아진다. 그래서 두 개를 씨리즈로 쓰고, RIAA 필터도 둘로 나눠 넣었다. 1단에서 저역 시정수를 잡고 두 번째 단 오피앰프에 고역 시정수를 넣었는데, 이렇게 구성하면 헤드룸은 좀 낮아지지만 노이즈 특성이 좋다. IC 포노 EQ 최대의 문제점이 바로 노이즈이므로, 이 방식을 선택하였다.

2단째의 IC 회로는 흔히 쓰는 씨리즈피드백이 아닌 션트피드이다 - 역상 출력이 되므로 카트리지의 배선을 뒤집어야 하는 불편을 감수하면서 션트 피드백을 쓰는 이유는, 션트 피드백의 필터 특성이 씨리즈 피드백보다 정확하기 때문이다. 고역 시정수는 저역보다 정확도를 많이 요구하므로, 고역 시정수가 들어가는 2단째에서 보다 정확한 커브를 얻을 수 있는 션트피드백으로 구성한 것이다. 앞단도 션트 피드백으로 하면 역상-역상으로 정상 출력을 얻을 수 있지만, 노이즈가 많아지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션트 피드백은 입력에 직렬로 들어가는 저항 때문에 씨리즈 피드백 구성보다 노이즈가 많다. 노이즈가 낮아야 하는 초단은 그래서 씨리즈 피드백, 정확한 필터 특성이 필요한 2단째는 션트 피드백. 여기다가 유니티 게인의 출력 버퍼를 션트 피드백으로 구성해서 달면 3단짜리 호화 EQ가 되겠지만, 이 회로는 한 섀시 안에 EQ랑 라인이랑 같이 들어갈 거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만약 이 회로를 써서 포노 전용으로 만들 거라면 션트 피드백으로 구성한 버퍼를 달아 3단으로 만들면 좋을 것이다.

아, 그리고 션트 피드백을 뒷 단으로 쓸 때 장점이 하나 더 있다: 버추얼 그라운드 입력이므로 (플러스 입력 핀이 그라운드에 접속) 입력 오프셋이 아주 낮아져, 출력에 커플링 컨덴서를 안 써도 된다. 나중에 FET 입력이 아닌 IC도 써 볼 예정이므로 이건 중요한 특징이다.

우선 이건 회로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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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주파수 특성 시뮬레이션이다. 1KHz에서 게인은 37.3dB로, 표준인 40dB 보다 약간 낮은 편이지만 이만하면 충분히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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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로가 간단한데다가 임시로 쓸 건데 돈 들여가며 기판을 뜰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만능기판이다. 통은 파메탈 공장에서 2만 5천원 주고 샀는데 알미늄에 동 도금한 2.5미리 두께의 섀시가 이만하면 아주 싸다. 트랜스는 부품통에 굴러다니는 놈 아무거나, 다른 부품들도 대개 부품 통에서 조달해서 쓴다. 비싼 부품이 있다면 셀렉터로 쓰는 NKK제 토글과 뱀파이어 제 RCA 잭, 그리고 노블 제 50K 볼륨 정도. 이건 내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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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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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측정하고, 또 들어본다. 이건 지난 번 제작한 역 RIAA 회로를 끼워서 실제 측정한 결과이다. 뭐 놀랄 일도 아니지만 대단히 정확하다. 오피앰프로 NFB 걸어서 만들었는데 정확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지. 이걸로 역 RIAA 필터의 유용성을 입증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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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노 단의 노이즈는 -76dB로, 제법 우수하다. 기대했던 이상이고, 이만하면 IC EQ로는 갈 데까지 갔다는 느낌. 포노 단의 디스토션은 1KHz에서 -72dB. 측정 기준 레벨은 5mV이다. 글쎄, 특성상으로는 이만하면 되었다 싶은데, 소리는 약간 미흡하다... 듣기는 편하고 스무드하지만, 소리에 기백이랄까 통쾌한 맛이 약하다. 늘 소리가 사나우면 물론 안 되겠지만, 거칠고 호탕한 음악을 틀었을 땐 그런 분위기를 제대로 내 줘야 할 텐데... 그리고 고역이 야아아아악간 까칠까칠하다. 비단결같은 촉촉한 느낌은 아무래도 나지 않는다. 음장감도, 넓기는 한데 깊이가 다소 얕고... 글쎄, 10만원도 채 안 든 프리앰프 치고는 그만하면 썩 훌륭한 셈이지만. 뭐, 그러니까 진공관으로 만들려고 하는 거지.

2005/11/23 05:29 2005/11/23 05:29

진공관 프리앰프 프로젝트 [2] - 역 RIAA 필터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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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시브 포노 스테이지를 설계하기 전에 필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역 RIAA 필터.

포노 스테이지의 출력은 플랫하지 않고, RIAA 에서 정해 놓은 커브를 따른다. 시뮬레이션으로 이 커브에 따르는 필터 정수를 얻을 수 있지만, 실제 만들어 보면 딱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증폭 소자의 특성이나 저항, 컨덴서 등의 값에 오차가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패시브 포노 스테이지는 NFB를 쓰지 않기 때문에 소자의 오차에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일반적으로 구할 수 있는 1% 저항을 쓰고 프리미엄급 진공관을 선별해서 매치한다고 해도, NFB 없는 패시브로는 1dB 이상 오차가 난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룰은, RIAA 커브 오차가 0.5dB 이내로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래서 패시브로 포노 스테이지를 만들 때는 시뮬레이션으로 대략의 정수를 구한 다음, 실제 회로를 구성해 놓고 동작시키면서 필터의 소자들을 이리저리 바꾸어 최적 정수를 찾을 수 밖에 없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이 역 RIAA 필터이다 - RIAA 커브의 정확한 반대 특성을 가진 회로. 이놈을 포노 스테이지의 입구에 달아 놓고 시그널 제네레이터를 돌리면, 포노 스테이지의 RIAA 커브와 이 역 RIAA 필터의 커브 특성이 합성된 출력이 나온다. 역 RIAA 필터가 정확하고 또 포노 스테이지의 RIAA 특성이 정확하다면 그 출력의 주파수 특성은 플랫하게 된다.

RIAA의 용도는 그 외에도 있다: 역 RIAA 필터를 잘 설계해서 1KHz에서 약 40dB 정도 감쇠를 시키면, CD 같은 라인 출력을 포노 카트리지 출력과 비슷한 특성의 신호로 변환할 수 있다. 즉 포노 스테이지의 음색을 CD를 들으면서 체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 만든 포노 스테이지를 에이징 시키는 데 쓸 수도 있다.

다 만들어놓은 역 RIAA 필터를 돈 주고 살 수도 있지만,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만원 정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살 이유가 없다. 게다가 시중에 파는 역 RIAA 필터들은 그다지 정확하지도 않고… 제일 정밀하다고 하는 것이 0.5dB 정도 오차를 보인다. 직접 만들면 그보다 훨씬 정확한 특성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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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AA 커브는 3개의 시정수를 가진다: 3180us, 318us, 75us (마이크로세컨드). 이 커브는 다음의 수학 공식으로 얻을 수 있다 :

RIAA Gain = {1 + (3.18-4) * s} / {1 + (3.18-3) * s}{1 + (7.5^-5) * s}

변수 s 는 (2 * pi * 주파수) 이다.위 공식의 분자/분모를 뒤집으면 바로 역 RIAA 커브가 나온다:

Inverse_RIAA Gain = {1 + (3.18-3) * s}{1 + (7.5-5) * s} / {1 + (3.18^-4) * s}

이 공식을 사용해서 스파이스로 필터를 시뮬레이션하면 아래와 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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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회로도는 이론상의 모델링이므로, 이번에는 실제 사용할 수 있는 필터를 시뮬레이션 해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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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레이션 상으로는 20-20KHz 내에서 0.01dB 이하의 오차로 역 RIAA 커브와 일치한다. 감쇠특성은 1KHz에서 약 -37dB 이고 출력 임피던스는 약 1K 옴이다. 이상적으로는 감쇠특성 -40dB, 출력 임피던스 600 옴이지만 이 정도로 충분히 실용가능하다.

회로상의 74.3K, 883.3K 등의 저항값은 시중에서 구할 수 없고 또 컨덴서의 컨덕턴스 값 오차 (보통 10%) 를 보정해야 하기 때문에 가변저항(트리머)을 사용한다. 비셰이 제 정밀 트리머를 쓰고 1% 오차의 정밀 저항과 5% 스티롤/세라믹 컨덴서를 사용해서 실제 만들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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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측정 결과 가청주파수 대역 내의 오차는 0.1dB 이하, 20-10Khz 내의 오차는 0.05dB 이하로 나온다. 완전 패시브이므로 노이즈나 디스토션은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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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프로젝트 기사는 IC를 이용한 NFB 형 포노 이퀄라이저 만들기이다. 이걸로 음악을 들을 것은 아니고, 역 RIAA 필터를 실험하기 위해서, 또 진공관의 패시브 회로로 과연 의도한 대로 일반 시중에 나돌아다니는 보급형 포노 스테이지를 “특성상” 능가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최신 고성능 IC로 어디까지 할 수 있나도 알아 볼 겸…

2005/11/15 04:44 2005/11/15 04:44

!! 궁극의 프리앰프 프로젝트 !!

그 동안 프리앰프에는 일부러 - 라기보다 돈이 없으니 - 필요최소한의 투자만 해 왔었다. 음색이나 음악성은 무시하고, 특성상 신호를 해치지 않고 잡음을 내지 않으며 조작하기 쉬운데다가 가격이 비싸지 않은 프리앰프만을 써 온 거다.

첫 프리앰프는 OP앰프 IC(LF357)를 두 개 써서 날림으로 자작한 것으로, 소리는 엉망이었다. 두 번째, 맥킨토시의 C33 - 부서지기 일보 직전의 중고. 잡음이 심했지만 음은 좋았었다고 기억한다. 이건 금방 포기했고, 그 후 약 5년간 오디오 알케미의 DLC와 애널로그 디바이시즈의 AD712 OP앰프로 자작한 프리앰프를 번갈아가며 사용했다. 오디오 알케미의 DLC는 싼 가격과 단순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소리가 꽤 괜찮았다... 요즘도 이베이에 종종 올라오는 걸 보면 찾는 사람들이 제법 있는 모양이다.

제대로 된 프리앰프는 3년 전에 구입한 맥킨토시의 C41이 처음이다. 거금 1500불을 주고 (물론 중고) 구입, 최근 내다 팔 때까지 아주 만족하며 잘 썼다. 맥킨토시 프리는 동사 파워앰프에 비해 별로 인기가 없지만 최근 제품들은 잡음도 안 내고 괴상한 음색(이게 좋아서 맥을 쓰시는 분도 많지만)도 없어서 좋다. 게다가, 맥킨토시의 전통에 충실하게, 포노 스테이지를 탑재하고 있는 것도 내게는 중요한 포인트였다.

각설, 그간 눈감아 온 프리앰프를 자작하기로 마음먹게 된 데는 이유가 셋 있다 : 첫째, 바로 그 맥킨토시 프리앰프의 포노 스테이지가 불만이었다... IC로 만든 거라, 특성으로나 음색으로나 범용을 면치 못하는 것이었다. (악명높은 NE5552를 쓰고 있다) 둘째로, 이제 슬슬 프리앰프에도 음악성을 요구해 볼까 하는 욕심이 들기도 했고. 마지막으로, 고성능에 음도 좋은 프리앰프를 이제는 어쩌면 만들 수 있겠다는 기술적인 자신감도 생겼다. 8년 전에 비하면 공부하고 경험한 바가 적지 않다고 자부하므로.

자, 이리하여, 대망의 프리앰프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죽을 때까지 쓸 물건을 만든다는 비젼으로... (절대 10년 이상을 안 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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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을 하기 전에, 아니 기초 설계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 우선, 지갑에 돈이 얼마나 있나 확인. 맥킨토시 팔고 받은 돈 1200불이 있다. 어림계산으로 이걸로는 모자란다는 것이 명확하다. 한 500불은 어떻겐가 융통이 가능하겠지. 그래서, 예산 합계 1700불.둘째로, 디자인 목표 설정이다. 왜 자작을 하려 하나? 1700불이면 중고로 쓸 만한 프리앰프를 얼마든지 살 수 있다. 1700불을 주고 살 수 없는 무엇인가를 원하기 때문에 자작을 하는 거라면, 그 원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조목조목 확인을 해 둘 필요가 있다.

  • 디자인 목표 1. 저잡음 저왜곡에 RIAA 편차 극소의 포노 스테이지.
  • 디자인 목표 2. 특성상 흠잡을 데가 없고, 특히 다이내믹 레인지가 넓은 라인앰프.
  • 디자인 목표 3. 거기다 더하여, 직렬 3극에 평판이라는 (대단히 민감하면서도 후련한 성격의) 시스템에 음색적으로 위화감이 없을 뿐 아니라, 현재 약간 아쉬운 "농밀한 우아함" 을 보충할 것. 민감하고 다이내믹한 성격은 증폭소자와 회로 구성으로, 진한 음색을 더하는 것은 패시브 소자의 조합으로 달성한다.
이제 목표는 설정했고, 그럼 구체적인 디자인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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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증폭소자 선택

목표 2번은 쉽다. 라인앰프는 앰프 중에서도 가장 쉬운 것이다. 3번도, 어떻게 달성할 지 대강 짐작이 있다. 1번, 1번 목표가 문제다... 제일 쉬운 것이 라인 앰프라면 앰프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포노 스테이지다!

MC 카트리지를 쓰는 경우, 증폭도는 중역에서 60dB - 즉 1000배 - 필요하고, 저역에서는 무려 10000배 증폭을 해야 한다. 전자 한 두개 정도가 움직이는 수준의 입력 신호를 다루어 1만배 증폭을 하는 것이라, 잡음은 나노볼트 레벨 이하로 떨어져야 하고, 왜곡 역시, 1만배 증폭도를 유지하면서 0.1% 이하를 달성해야 한다. 게다가 역시 0.1% 이하의 RIAA 편차도 달성해야 한다. IC로 만든 포노 스테이지가 별볼일 없는 것이 이런 기술적인 요구사항들 때문이다. 최근의 괄목할 만한 발달에도 불구하고, 최고급 JFET IC로 달성할 수 있는 잡음 레벨은 10nV 수준. MM 카트리지를 쓴다면 순시 트렌젼트 +30dBu의 입력에 찌그러지지 않는 광대한 헤드룸이 필요한데, NFB를 거는 OP앰프로서는 이것 역시 대단히 힘겨운 요구이다. 그러한 이유로, IC는 쓰지 않는다.

그럼 JFET와 BJT 트랜지스터를 섞어 디스크릿으로 설계하든지, 아니면 진공관이란 얘기다. 그런데, 디스크릿 트랜지스터 디자인에도 문제가 있다: 저잡음을 위해 초단에 JFET 디퍼런셜 페어를 쓰지만, JFET는 왜곡이 많다. 왜곡을 낮추기 위해서는 NFB를 많이 걸어야 하는데, JFET는 증폭도도 낮기 때문에 곤란하다. 게다가 주파수 특성이 심하게 변하는 포노 스테이지 같은 앰프에서 NFB를 써서 왜곡을 낮춘다는 것 자체가 기술적으로 나쁜 아이디어이다... 저역에서는 높은 증폭도를 달성해야 하기 때문에 NFB 양이 줄고, 따라서 왜곡이 올라간다. 고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대량의 NFB가 걸려 안정성이 나빠진다. 그것도 모자라서, 문제가 더 있다 -- NFB로 RIAA 필터링을 하게 되면 저역에서 다이내믹 레인지가 줄어든다 (헤드룸이 부족하다.) 트랜지스터로 NFB 걸지 않고 설계할 수도 있지만 (Pass Labs의 Xono 처럼) 우수한 특성을 얻기가 대단히 어렵다. Nelson Pass 같은 천재나 할 수 있을까... 마크 레빈슨의 프리앰프가 전설의 명성을 얻었던 것도 바로 천재 존 컬이 디자인한 포노 스테이지 때문이었지 않은가. 내게는 그런 재주가 없다. 트랜지스터도 아웃.

그럼, 진공관이다. 진공관으로 잘 설계하면 잡음을 1-3 나노볼트까지 내릴 수 있다. 높은 입력 임피던스와 전원 잡음만 잘 컨트롤하면 진공관으로 저잡음을 달성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즉, 존슨 노이즈와 전원 노이즈만 걱정하면 되고 증폭소자 자체의 노이즈 (이걸 리콤비네이션 노이즈라 한다) 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거다. 입력 전류 잡음이 원리상 발생하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고. (일부러 흘리지만 않는다면, 진공관의 그리드 전류는 없다고 봐도 된다. JFET도 입력전류가 없다고들 하지만, 게이트 누설전류가 무시하기에는 좀 많다.) 게다가, 진공관은 본래 왜곡이 대단히 낮은 소자이기 때문에 NFB를 쓰지 않아도 0.1% 왜곡률을 어렵지 않게 달성할 수 있다.

포노 앰프를 진공관으로 구성하면서 라인앰프에 트랜지스터나 IC를 써서 복잡하게 만들 이유가 없다. (사실 별도 섀시에 라인앰프를 짜면 디스크릿 트랜지스터 회로로 문제가 없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앞뒤로 쭉 다 진공관인데 라인앰프만 딸랑 반도체로 하기가 뭐해서 그러는 거다.) 이로써 증폭소자 결정 -- 증폭소자는 진공관, 그것도 왜곡이 극히 낮은 3극관. 진공관 종류는 이미 마음에 둔 선택이 있다: 내 사랑하는 RCA의, 그것도 RCA 최고의, 5691과 5692. 옥탈관을 쓰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옥탈관은 마이크로포닉 노이즈가 미니어쳐관보다 일반적으로 낮다. 5691, 5692는 그 낮은 마이크로포닉 노이즈로 특히 이름난 옥탈관들이다. 원래 미사일에 들어가기 위해 개발된 다마들이니까. 둘째, 5691과 5692가 비록 비싸지만 프리미엄 급 미니어쳐관 -- 예컨대 텔레풍켄 E802CC -- 보다는 훨씬 저렴하고 구하기도 쉽다. 세번째, 옥탈관이 미니어쳐관보다 납땜하기가 쉽다. 기판을 쓰지 않을 것이므로 (기판은 대량생산하는 경우 생산성과 퀄리티 컨트롤 면에서 유리한 외에는 포인트 투 포인트 와이어링보다 모든 면에서 불리하다) 공간이 넉넉한 옥탈관이 기판을 쓰지 않고 자작하기에 훨씬 유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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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회로 토폴로지 선택

이미 NFB를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럼 RIAA 필터는 자동적으로 액티브가 아닌 패시브가 된다. 패시브 RIAA 필터링은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증폭단 사이에 저항, 컨덴서, 코일 등의 패시브 소자로 구성된 필터를 삽입하여 RIAA 커브 보정을 하는 회로이다. 진공관 소자 자체가 압도적으로 헤드룸이 높은데다가, 패시브 필터 역시 다이내믹 레인지 면에서 액티브 필터보다 훨씬 유리하다. 증폭단은 전압 증폭에 적합하고 또 심플한 셀프바이어스의 커먼 캐소드 회로를 쓴다. 이건 3번 목표 달성을 위한 것이다 - SRPP나 뮤 폴로워는 특성상 약간 더 유리하지만 (고증폭도, 전원에 덜 민감함) 음색적으로는 커먼 캐소드의 자연체 음색보다 확실히 뒤떨어진다. 케스케이드나 케스코드, 액티브 로딩 등 다소자 복합 증폭회로에 따라다니는 문제점은 고특성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런 음색이 잘 안 나온다는 것이다. 증폭도는 커먼 캐소드 회로로도 이미 충분하고, 커런트 소스 등 액티브 로딩을 하지 않아도 다이내믹 레인지나 슬루 레이트 역시 부족함이 없으며, 전원 노이즈 역시 달리 생각해 둔 대책이 있으므로, 굳이 음색에 손해를 보면서 복잡한 다소자 복합 회로를 쓸 필요가 없다. 게다가, 패시브 RIAA는 소자에 극히 민감하다... 소자 숫자가 늘어나면 음색 컨트롤이 기하급수적으로 어려워진다.

라인앰프에도 마찬가지로 NFB 걸지 않은 심플 커먼 캐소드 회로. 그런데, 라인앰프 특유의 문제가 있다 : 라인앰프는 출력 임피던스가 낮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1KOhm 이하라야 한다. 보통 진공관 라인앰프는 이 문제를 캐소드 폴로워 회로를 써서 해결하지만, 캐소드 폴로워는 별로 음이 좋은 회로가 아니다. 캐소드 폴로워 말고 출력 임피던스를 낮추는 방법은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출력관을 다수 병렬해서 플레이트 내부 저항을 낮추거나, 아니면 츨력 트랜스를 쓰거나. 첫번째 방법의 문제는, 출력관을 적어도 5개에서 10개 병렬해야 출력 임피던스를 1KOhm까지 내릴 수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 방법의 문제는 보통 구할 수 있는 라인 출력 트랜스의 임피던스가 3KOhm 정도로 낮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는 진공관이 한정된다는 것이다. 트랜스와 출력관의 임피던스 매칭이 되지 않으면 주파수 특성과 트랜젼트 특성이 급격히 나빠진다.

위의 두 방법을 병용하면 세 번째 방법이 생겨난다... 다수 병렬한 출력관에 트랜스를 다는 방법. 일반적으로 라인앰프에 많이 쓰는 6SN7을 쓰는 경우, 두 개만 병렬해도 플레이트 내부 저항이 3 - 4KOhm 까지 떨어진다. 이로써 흔히 나돌아다니는 3KOhm 짜리 출력 트랜스를 정격에 맞게 쓸 수 있다.

트랜스 출력이므로 출력 임피던스가 100 - 600 Ohm으로 충분히 낮을 뿐만 아니라, 부하 저항 변동으로부터 출력관이 격리되어 회로가 극히 안정하고, 출력에 커플링 컨덴서가 필요없으며, 여하한 상황에서도 - 예컨대 고장이나 오동작 - 출력에 직류가 흐를 염려가 없다.

회로 토폴로지 선택: 부귀환 없는 심플한 3극관 커먼 캐소드 회로, 패시브 RIAA 필터링, 출력 트랜스 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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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원부 선택

진공관으로 프리앰프를 만드는 경우 전원은 흔히 반도체로 구성된 레귤레이터를 쓴다. 이것은 사실 기술적으로 별나게 유리하기 때문이 아니라 상품으로 개발하는 경우 생산 및 퀄리티 컨트롤이 훨씬 싸게 먹히기 때문에 흔히 채용하는 것이다. 단 1대만 만들면 되는 자작의 경우 음색적으로 뒤떨어지는 레귤레이터를 쓸 이유가 없다. (레귤레이터는 NFB를 뜻한다. 이미 앰프에 NFB를 쓰지 않는데 왜 전원에 NFB를 써서 소리를 버릴까? 앰프의 슬루 레이트와 다이내믹 레인지, 왜곡 특성은 증폭부와 전원부의 곱하기이므로, 둘 중 하나만 나빠도 나빠진다. 게다가 앞서 말한 다소자 복합회로의 문제점이 전원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럼, 반도체로 정류를 하고 레귤레이션을 하지 않으면 어떨까? 반도체정류는 대전류가 필요할 때 유리하지 프리앰프처럼 수십 밀리암페어로 충분한 경우 전혀 득이 없다. 게다가, 반도체 다이오드는 스위칭 잡음이 심하다. 커먼 캐소드 회로는 전원에 민감하므로 스위칭 잡음 같은 특별히 듣기 괴로운 종류의 잡음은 절대 사절이다.

그럼 진공관 정류에 노 레귤레이션. 진공관은 역시 RCA의 80, 구할 수만 있다면 80 중 최고라는 280 벌룬. 한 가지 문제는, 진공관 정류의 경우 대용량 필터 콘덴서를 쓸 수 없으므로 레귤레이션을 하지 않는다면 리플이 많아져서 험이 발생한다. 이걸 해결하는 방법은: 쵸크 인풋. 그것도 씨리즈로 두개 써서 24dB/Oct. 의 로패스 필터를 구성한다. 이렇게 구성해서 리플 전압은 360볼트 전원전압에서 20마이크로볼트! (약 0.002퍼센트, 또는 -94dB. 믿거나 말거나) 이건 레귤레이션으로도 달성하기 어려운 초저잡음 전원부이다. 완전 패시브이므로 레귤레이션에 따라 다니는 슬루 리미트가 발생하지 않는다. 게다가 정류관 자체가 소프트 스타트이므로 전원을 켰을 때 비싼 증폭관과 필터 콘덴서들을 갑작스런 전압 인가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불행히도, 히터 전원만큼은 어쩔 수 없이 반도체 정류를 해야 하겠다. 음색상으로는 히터를 교류 점화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험 때문에, 포노 스테이지에는 교류 점화를 할 수 없다. 그 다음으로는 션트 / 씨리즈 복합 레귤레이션이 좋지만 회로가 제법 복잡해지는데다가 단순한 패시브 직류전원보다 월등히 우수하지도 않으므로 (진공관의 히터는 자체적으로 커런트 리미팅을 한다) 그냥 단순한 패시브 정류 직류점화를 하기로 한다. 이것 하나만이, 전체 회로에서 내가 유일하게 타협하는 부분이다.

전원부 선택: 쵸크 인풋 진공관 정류에 노 레귤레이션. 쵸크/컨덴서 필터는 두 개를 직렬로 쓰고 진공관은 직렬관인 RCA 80. 히터 전원은 반도체 정류에 역시 노 레귤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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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회사에서 이렇게 만든 프리앰프를 팔까? 내가 아는 한, 2천 - 3천만원 이하로는 없다. 내가 선택한 옵션들은 대량생산하는 상품에는 절대 채택할 수 없는 것들이기에. 이런 식으로 프리앰프를 만들게 되면 부품 -- 예컨대 출력 트랜스 -- 의 단가가 대량 구매를 해도 그다지 싸지지 않는 데다가 한 대 한 대 개별적으로 신중하게 조정해야 한다. 수 백 수 천 대 만들어 팔 것이라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거다. 하지만, 단 1대 만드는 자작의 경우 오히려 싸게 먹히고, 어차피 1대만 만들 것이므로 개별적인 신중한 조정 역시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1700불을 들여서 1700불 아니라 17000불로도 얻기 어려운 프리앰프를 만들겠다는 야심이다.

다음 단계는 구체적인 회로 설계가 되겠다. 이건 시간이 좀 걸리니까, 다음 업뎃 때...

2005/11/12 14:50 2005/11/12 14:50

오디오 하다보면 자제력이 필요할 때가 많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인 모양으로, 이거 참 쉽지 않다. 내가 본래 자제를 잘 못하는 인간이기도 하지만... 오디오가 어른 장난감이고 이 장난 할 때는 어른이 애가 되는 것이고보면... 애한테 장난감을 자제하라는 것이 도대체 어려운 주문인 것이다.

LE85 드라이버를 근 7년간 써 왔고, 대부분의 음악을 이것을 통해 들어왔다. 다이어프램이 부서지고 짝이 맞지 않는데도 끈질기게 갖고 논 것 보면 대단히 마음에 든 것인데... 얼마 전 클리블렌드 사는 오디오 친구네 집에서 TAD TD-2001 드라이버를 듣게 되었다.

대단한 성능이었다. TAD 드라이버는 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지만 너무나 비싼 가격에 한 번도 진지하게 시스템에 도입한다는 궁리를 해 본적이 없었다... 500Hz부터 20KHz를 커버하는 광대역에, LE85보다 두배는 더 큰 고능률. 알니코 자석에 2인치 구경의 알미늄 리본 보이스코일. 5겹의 바늘끝같이 좁은 슬릿. 게다가 진동판은 타이태늄의 3배 강도를 자랑하는, 다이아몬드 다음으로 진동전달이 빠른 베릴륨이다. 그 친구 말하길, "If you want'em, I'll sacrifice them for a grand. That's about a half of what I paid."

마침 드라이버를 찾고 있는 중이었고, 부서진 오리지날 다이어프램 대신 쓸만한 진동판을 이것저것 실험해 보는 중이었다. 유혹도 이런 유혹이 없는데... 돈만 많다면 당장 집어왔겠지만...

애가 된다고는 하지만, 애 장난감과는 달리 이건 내 주머니의 돈이 나가는 것이다. 그것도 한 두 푼이 아니고 1000불이다.


자제력.

2004/08/05 01:33 2004/08/05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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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4는... 아니 이제 704라고 불러줘야 하나... 우선 대충 마무리해서 신디사이저/홈 스튜디오 용으로 사용중이고, 짝이 맞는 LE85 드라이버 진동판을 새로 구하기 전까지 젠센 2웨이도 잠시 은퇴. 우선 음악을 들을 것이 필요하므로, 수프라복스를 다시 꺼냈다.

평판에 단 소리가 가장 훌륭하지만, 기왕 새로 끄집어내어 다시 설치하는 김에 새로운 토폴로지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 위상반전형. 아아주 큰 통이 필요할 거라고 지레짐작해서 100리터들이 테스트박스에 달아봤더니 저음이 온데간데 없다. 튜닝을 아무리 만져봐도 저음이 나지 않으니 - 둘 중 하나. 더 큰 통이 필요하거나, 아니면 더 작은 통에 넣어야 하거나. 시뮬레이션으로는 85리터 박스/50Hz 튜닝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나오는데....

밑져야 본전이므로, 전에 망가 2웨이 만들 때 썼던 35리터 들이 통에다가 서브 배플을 달고 그 위에 수프라복스를 장착해 보았다. 튜닝은 40Hz. 틸/스몰 모델링으로 보면 완전 엉터리, 제대로 된 소리가 날 턱이 없다. 그런데...오! 멋진 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저음도 댐핑이 바짝 걸려 경쾌하면서도 깊숙이 뻗는다. 전형적인 베이스리플렉스의 저음이지만, 대편성 교향곡만 걸지 않으면 상당히 들을 만하다. 무엇보다 너무 재지 않으면서 음악을 신나게 들려주는 미점이 있고, 가벼운 리스닝에는 심각하고 엄정한 젠센보다 훨씬 적합하다. 나중에 배플을 쓰기 힘들 만큼 작은 방에 살게 되면 이게 메인 스피커가 될 것 같다...

모델링/시뮬레이션은 어디까지나 참고가 될 뿐 너무 믿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은 셈이다. 빈티지 드라이버들이나 이 수프라복스처럼 특이한 유닛들은 틸/스몰 이론에 잘 들어맞지 않는 것이다. 어쩌다보니 소 뒷걸음에 쥐잡기로 성공한 이 스피커, 모양도 아주 이쁘다. 소리의 캐릭터와 잘 어울린다.

2004/05/30 01:24 2004/05/30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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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코닉이란 브랜드 명은 웨스턴 일렉트릭 시절로 거슬러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이름이다. 알텍이 아직 랜싱 사운드 컴퍼니를 합병하기 전에 쓰던 브랜드인데, 이미 제임스 랜싱이 알텍을 위해 515 우퍼의 원형을 디자인하고, 나중에 802 드라이버가 될 102 필드코일 드라이버를 제작하고 있었다. 아이코닉의 제품은 짧은 기간 동안 아주 소수만 만들어져 그리 널리 퍼져 있지 않지만, 515 우퍼의 센터 폴을 섹트럴 혼으로 관통해서 컴프레션 드라이버를 조합한다는 아이디어는 이미 그 청사진이 나와 있었다고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604의 오리지날이 탄노이 듀얼 콘센트릭보다 먼저 나온 것이다)

아이코닉이 부활했다. 알텍 랜싱은 80년대 말에 EV에 합병되면서 연구 개발을 중단하고 97년에 중국에 브랜드 네임마저 팔려버려 실제로 망한 상태다. 컴퓨터용으로 많이 쓰이는 알텍 랜싱 스피커들은 중국의 알텍 랜싱 테크놀로지즈에서 생산하는 것들로, 원래의 알텍 회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열받고 상처입은 옛 알텍의 엔지니어들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는 야심을 품고 재설립한 회사가 바로 이 [아이코닉 매뉴팩쳐링 컴퍼니]로, 아직 상장은 하지 않았지만 활발한 제품개발/생산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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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이번에 새로 구입한 아이코닉의 704-8A 코액셜 드라이버다. 보면 알겠지만 이름만 바뀌었을 뿐 옛 알텍의 604와 똑 같은 물건이다. 모양만 똑 같다고 하면 중국에서 생산하는 가짜 (604-8L)도 똑같이 생겼지만... 이 물건은 진짜고, 옛 공장에서 604만들던 기계로 오리지날 부품을 써서 604 만들던 기술자들과 직공들이 만들었다. 글자 그대로 진짜 604다.

604를 소유하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의 꿈이었다. 이미 A-7 시스템을 써 보았기 때문에, 소리가 탐나서라기 보다는 그 꿈을 잊지 못해 구입한 것이다. 나이먹어 은퇴한 사람들이 어릴 적의 동경을 찾아 스포츠카를 구입하는 심리와 비슷한 거다.

604는 오리지날 604, 604B, C, D, E, G, H, K 그리고 변종으로 605-A 및 B 이렇게 다양한 종류가 있다. 오리지날과 B는 픽스드 에지에 나비 댐퍼를 쓴 515 우퍼와 802 드라이버를 합친 것으로,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일 뿐 아니라 설혹 구한다 해도 천문학적인 가격이다. C가 되면서 에지에 도핑재를 바르고 잘 부서지는 오리지날 섹트럴 혼을 작게 축소한다. E 버전부터 에지를 린넨 천으로 바꾸고, G가 되면서 프레임을 16인치로 키우고, H부터 모양뿐인 섹트럴 혼을 만타레이 혼이라고 CD 혼의 일종으로 변경한다. K는 더 이상 싸게 구입할 수 없게된 알니코V 자석 대신 페라이트를 쓴 버전이고... 605는 좀 싸게 만든 604인데 우퍼부가 515대신 416, 컴프레션 드라이버도 802 대신 806을 쓴 것이다.

604는 록과 팝에 관한 한 아직도 스튜디오 모니터의 미국 업계 표준이다. 보통 [빅 레드]라고 불리는 612 케비닛에 담겨 있고, 마스터링 랩에서 설계한 크로스오버를 달고 있다. 마스터링 랩에서는 여전히 이 604로 (G 버전) 일을 한다.

한국에도 604 쓰시는 분들이 아주 많다. 오페라 같은 대편성 음악, 재즈나 블루스, 성악/피아노/타악기/관악기가 많이 들어간 음악에 강하고, 100dB를 넘는 고능률에 저 아래까지 당당하게 뻗는 중후한 저음으로 사랑받고 있지만... 현악이나 섬세한 음악에는 전혀 아니올시다인데다가, 좁은 방에서 들으면 시끄럽기가 보통이 아니다. 오리지날이나 B는 그나마 우아한 품위가 있어 C부터 G 까지의 후기 버전들보다 덜 시끄럽고 소리도 전반적으로 낫다고 한다 - 내 귀에는 H 소리가 가장 좋지만. (내 생각에 오리지날이나 B가 덜 시끄러운 것은 알니코 자석이 오랜 세월에 걸쳐 자력을 소실해서 그런 것이다. 알니코는 퀴리 온도가 페라이트보다 낮아서 열 받으면 쉽게 자력을 잃는다. 또 오리지날과 B는 제대로 된 큼지막한 섹트럴 혼이 달려 있어서 중음 대역이 C, E, G보다는 훨씬 부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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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구입한 704는 페라이트 자석을 쓴 것이므로 구조상 K와 동일하다 - 515G 우퍼에 902K 드라이버를 합체시킨 거다. 일단 100리터 들이 EV 상자에 넣어 들어보았더니 통이 작아 저음이 뻗지는 않지만 이대로도 훌륭한 604의 소리를 낸다. 나중에 오리지날인 620C 인클로져를 구하게 되면 거기 넣어서 들어봐야겠지만, 우선은 이걸로 만족한다.

전용 크로스오버는 발매는 하고 있지만 같이 구입하지 않았다. G 버전 까지의 오리지날 크로스오버는 씨리즈 필터라고 해서 요즈음은 거의 쓰지 않는 종류이고, 특성도 별로 좋지 않다. H와 K는 일반적인 패럴렐 필터를 쓰고 저음쪽 2차 고음 쪽 3차의 버터워스 필터를 채용한 것으로, 오리지날보단 낫지만 여전히 쓸만한 물건이 못 된다. 마스터링 랩이나 유레이 제 크로스오버가 훨씬 낫지만 구하기가 힘든지라, 내 나름으로 만들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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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KHz에서 나누는 저음 2차, 고음 2차의 링크위츠 필터이다. 통이 작아 저음이 안 나므로 패시브 EQ를 짜 넣었다 (1K 센터포인트, Q 0.3의 씨리즈 노치 필터) 제대로 된 큰 통 (200리터 이상) 을 쓴다면 필요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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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4는 주파수 특성만 갖고 보면 아주 형편없는 스피커다. 오르락 내리락... 보통 스튜디오에서는 라인레벨에서 액티브 EQ로 플랫하게 만들어서 쓴다. 나도 EQ가 있지만, 일단 패시브로 할 수 있는데까지 한 다음에 쓰는 것이 원칙이다. EQ 안 쓴 상태에서도 저만하면 604 치고는 괜찮은 특성이다. 능률은 100dB가 넘어 문제가 없지만, 604는 싱글 진공관 앰프로 울리기가 나쁘다. 16인치 구경의 그것도 굉장히 무거운 콘과 무식하게 큰 자석의 조합은 강력한 구동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얼마 전 완성한 FET 파워앰프로 울린 소리가 2A3 앰프로 드라이브했을 때보다 훨씬 좋다.

그러구러 한 이틀 들어 보았는데... 소편성 클래식이나 현악은 역시 좀 아니다. 하지만 록이나 재즈는, 과연 명불허전. 604를 오래 쓰신 분들 얘기로는, 잘 길들여서 604로 현을 낼 수 있게 되면 그 소리가 그야말로 기막히다고 한다. 나도 그런 소리 좀 들어보고 싶은데, 과연 가능할런지..?

어찌되었든, 소년시절의 꿈 하나를 이루었다. 좀 유치한 느낌도 들지만, 아아주 행복하다.

2004/05/02 22:38 2004/05/02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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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CD 플레이어가 바뀐 것을 먼저 보고해야 하겠다... 나의 주 소스는 레코드이고 CD는 보조격인지라, 들이는 돈과 정성도 LP 쪽에 편중되어 있다. 여태 쓰던 CDP들은 대개가 보급가격대의 "쓸만한" 것들이었고... (소니-데논-토렌스-그리고 최근까지 쓰던 레가) 레가는 고역이 이쁘고 아랫쪽으로도 풍성하게 울리는 좋은 플레이어였는데...그만 덜컥 고장이 나 버렸다. 그것도 서보/메카니즘 계의 고장이라 영국의 공장에 돌아가야 한단다. 송료며 수리비 (워런티가 마침 끝나 버려서 실비를 내야 한다나) 를 생각해 보니 아예 새걸 사는게 나을 듯해서, 바꿔 버렸다.

새로 구입한 CDP는 뮤지컬 피델리티의 A3.2 -- 잘 알려진 대로 베스트셀러이고, 내부에서 24비트 96KHz로 업샘플링을 하는, 요즘 유행하는 종류이다. 그다지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는데, 글쎄 소리가 제법 근사하다. 고역이 아주 부드럽고 광채가 있으며, 저음이 약간 마른 대신 깊이 뻗고 단단하다. 전반적으로 정확하고 엄격한 소리라기보다는 음악을 그럴싸하게, 익사이팅하게 들려주는 종류이고, 그것으로 나쁘지 않다. 트레이 로딩이라 랙에 설치하기도 용이해서 맘에 들어하고 있다.

CDP 위에 놓인 물건은 베링거의 DSP8000 디지탈 이퀄라이저인데, 쓰지는 않고 연결도 안 되어 있다. CDP의 상판이 그냥 앏은 철판이라 묵직한 이놈을 위에 올려 놓으면 댐핑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고 한 번 올려놔 본 건데... 효과가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고, 다시 집어넣기 귀찮아 그냥 올려놓고 있다. 아, 저 목제 랙은... 싸구려 아이키아(IKEA)제 AV 랙인데 그냥 모양이 좋아서 사서 쓰고 있다. 장치들이 하나하나 다 상당히 무겁기 때문에 별달리 랙에 돈을 들이지 않아도 이걸로 되지 않겠느냐... 하고 좀 근거가 빈약한 내 나름의 정당화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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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스피커도 바뀌었다. 수프라복스에 불만이 있어서 바꾼 건 아니고, (수프라복스는 박스에 잘 모셔져 있다) 이전 포스트에서 언급했던 대구경 우퍼+혼 2웨이 평판을 해 보고 싶어서 바꾼 거다. 필요한 드라이버들은 다 있고, 평판 날개는 수프라복스에 쓰던 걸 재활용하면 되니까, 메인 배플과 크로스오버만 있으면 되는 셈이다.

메인배플은 PHY와 수프라복스 쓰면서 재미 본 경량/고밀도/고강도 북해산 자작나무 합판. 이번엔 시커멓게 하는 대신 짙은 갈색으로 해 봤는데 그런 대로 보기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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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음용 드라이버는 젠센의 A-12이다. 전자석을 쓰는 40년대 물건으로, 하몬드 B-2 오르간에 들어가는 바람에 명성을 떨쳤고 지금도 클랑필름을 돈이 없어 못 쓰는 많은 빈티지 팬들을 위로하고 있는 아주 착한 드라이버다. 약 1.2의 무지 높은 Q 때문에 오직 평판에서만 제대로 소리를 내는 특징이 있고, 50볼트 전압에서 약 100dB의 고능률을 자랑한다. 다만, 악기용으로 개발된 까닭에 주파수 특성에 오르락내리락이 심해서, 플랫한 특성을 얻기는 어렵고 참고 들어야 한다. 음색상의 특징이라면, 맑고 투명하면서도 죽죽 잘 뻗치는 중저음을 들 수 있다. 저음이 투명하다고 하면 좀 말이 안 되는데, 그래도 그런 느낌이 난다. 저 아랫쪽 70Hz 이하는 잘 안 나오는데... 방이 작으면 별 상관없지만 큰 방에서는 아마 저음이 모자랄 것이다. (그래서 보통 A-12 쓰시는 분들이 한 쪽에 2개씩 네 개 쓴다)

고음에는 JBL의 LE-85 1인치 컴프레션 드라이버를 650Hz 트랙트릭스 에드가혼에 달았다. 브루스 에드가 박사는 혼 쪽으로 미국에서 높은 명성을 누리는 양반인데, 목제 트랙트릭스 혼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저런 똥그라미 혼을 주문제작해 주고 있다... 한 개에 35만원이나 받지만, 여타 바이래디얼 혼이나 섹트럴 혼보다 중음이 순수하고 혼 울림이 적어서 좋다. JBL 드라이버는 고역이 좀 소란스럽고 경박한 느낌이 있는데, 목제 트랙트릭스 혼 덕분에 차분하고 쫀득쫀득한 소리를 얻을 수 있었다. 중고음용 혼은 혼 표면이 거칠면 좋지 않다. 에드가혼은 다듬지 않은 상태로 배달되기 때문에, 약 1주일에 걸쳐 혼 표면을 물사포로 갈고 3층의 랙카 칠을 했다. 이렇게 매끄럽게 다듬고 칠을 해 놓으면 보기만 좋은 게 아니고 소리도 매끄러워진다. 크로스오버는 링크위츠 2차 필터이고, 크로스오버 주파수는 1.2KHz. 더 낮추고 싶지만 혼이 작아서 800Hz 이하로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다소 높게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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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는... 글쎄, 중저역-중역-고역이 대단히 청명하고 직선성이 좋으면서 혼 답지 않게 음장감도 뛰어난데, 저음이 약간 가볍고 초저역은 당연, 완전실종이다. 100Hz 부근이 좀 솟아서 벌충을 하긴 하는데, 음악에 따라 듣기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고 그렇다. 전반적으로 바람처럼 가볍고 순수하면서도 음압감, 현장감이 좋은 훌륭한 소리인데 저역의 그 버릇만 없으면 정말 좋겠는데... 흠, 수프라복스와 비교하자면... 나로서는 다소 통일감이 모자라고 어설픈 면이 없지 않지만 역시 장엄하고 당당한 느낌이 제대로 나오는 젠센+JBL 2웨이 평판 쪽을 선택하련다.

...그런데 그럼, 거액을 들여 구입한 수프라복스는 이제 어쩌나...?

2004/04/28 22:06 2004/04/28 22:06

제목을 오디오 여정이라 달아놓고 보니 되게 거창하게 들린다. 하지만 오디오 광이라고 자처한 지가 그야말로 4반세기이니 아주 당치 않은 소리는 아닐 터. 이 글은 사실 원래 딴 사람들 보라고 썼다기보다는 스스로 정리를 좀 해 볼 요량으로 쓴 것인데, 그래도 혹시 누군가 읽고 무슨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된다면 기쁜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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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경험

음악을 사랑하고 즐긴 지는 퍽 오래 되어서, 아홉 살 무렵 선친께서 사 오신 일본의 4중창단 Dark Ducks의 러시아 민요 모음집을 듣고 신명이 올라 한참 춤을 추었던 것이 기억나는 처음이다. 그 곡조가 퍽이나 인상깊었던지 아직도 대부분의 트랙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선친은 대단한 음악애호가여서 무려 3000장에 달하는 SP 레코드 콜렉션을 보유하고 계셨다고 하는데 나는 본 적이 없고,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유성기와 함께 이미 어느 박물관에 모두 기증하셨던 것으로 안다. 여즉 보유하고 계셨던 한 200여장 되는 LP 레코드를 일제 전축으로 감상하곤 하셨는데, 물론 그건 내가 손 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국민학교 6학년 무렵부터는 친구들과 어울려 당시 유행하던 대중음악들을 즐겨 들었다. 제대로 된 오디오가 수중에 있을 턱이 없어서 동네 레코드 가게에서 카세트 테입을 녹음해다가 듣는 것이 고작이었다. 친구들 중에 두엇은 포터블 전축이 있어 해적판을 구입해서 듣곤 하였는데 몹시 부러웠던 기억이 난다... 집의 창고에는 고모부가 쓰시던 60년도산 장전축이 있었는데 그 썩어빠진 것을 어찌어찌 뜯어맞추어 소리가 나게 만들었던 것이 말하자면 오디오 첫 걸음이다 (이 스토리는 [자작을 시작하게 된 사연] 포스트에 자세히 써 놓았다). 드디어 소원하던 카세트와 해적판을 들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친구들을 불러다가 자랑하고 분식집에서 한 턱 내기까지 했었다. 돌이켜 보면 그 장전축에 들어있던 앰프는 다름아닌 6AR5 싱글 진공관 앰프였고 스피커는 지금도 찾는 사람이 많은 6 X 9 인치 타원형 텔레풍켄 풀레인지였다! 무엇도 모르면서 상당히 고급 장치로 오디오 인생을 출발한 셈이랄까.

중학교 1학년 때, 서울 사는 오촌 조카네 집에 놀러가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오디오를 접하게 된다. 이 조카님은 나보다 다섯 살 연상인데, 지금은 어엿한 가장이요 아버지가 되었지만 그 때는 고등학생이었다. 집이 상당한 부자여서, 고등학생 주제에 방에 그 당시만 해도 구경하기 힘들었던 JBL 스피커며 마란츠 앰프를 늘어놓고 음악을 즐기고 있었는데… 앰프의 모델 명은 잊었지만 그 스피커는 잘 기억하고 있다 – 바로 JBL 가정용 스피커 중 역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L100 Century 였다. 세상에 전축에서 이런 소리가 나다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한 거다. JBL은 콘 위에 바르는 댐핑재 - Aquaplus라고 부르는 – 에서 나는 독특한 냄새가 있는데, 그 냄새의 첫 인상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걸로 들었던 음악은… 좀 수준이 떨어지는, 하지만 JBL과 너무 잘 어울리는 보니 엠의 “Painter Man”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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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학창시절

JBL 스피커 같은 것을 시골 사는 중학생 주제에 입수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집이 그리 가난한 편은 아니었지만 아이 취미생활에 무슨 돈을 몇 십 만원씩 내 주는 그런 집은 결코 아니었다. 그때까지 듣던 장전축 더하기 카스테레오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어떻게 좀 발전해 보려고 별 짓을 다 했지만 돈도 없거니와 뭐 아는 게 없으니. 이후 삼성 카세트라디오를 갖게 되어 거기다가 예의 텔레풍켄 풀레인지를 달아 듣는 게 고작이었다.

고교시절에는 방천시장에서 만 원 주고 산 해체 직전의 중고 산수이 리시버에 교동시장에서 부품 사다가 뜯어맞춘 8인치 2웨이 스피커로 나아갔고, 나중에 이 시스템이 발전하여 내가 생각해도 대견할 만큼 그럴싸한 소리를 내었다. 삼미와 마샬 유닛을 장비한 2웨이는 어디선가 주워 온 소니 6인치 풀레인지를 중역에 달아 3웨이로 발전하고, 베이스 리플렉스였던 케비닛은 방 벽을 활용한 1.5미터 길이의 프론트 로딩 혼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게 고 2 말 쯤의 이야기로, 고 2가 그만하면 상당한 경지(?)에 오른 오디오파일이었던 셈이다.

집에서 듣는 시스템의 소리를 나름대로 평가하는 기준은 당시 대구에 많이 생겨났던 소위 “음악감상실”의 소리였다. 지금은 그 음악감상실들 이름도 대부분 잊어버렸지만, 거기 놓여 있던 장비들은 잘 기억하고 있다. 맥킨토시 2205로 울리는 알텍 604, GAS 앰프질라로 울리는 역시 알텍의 A-1과 A-7, 정체불명의 앰프가 드라이브하는 탄노이 오토그래프. 모두 JBL 센츄리가 발 벗고 평생을 뛰어도 쫓아오지 못할 대단한 소리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각별했던 것은 대구의 명물 녹향 음악감상실에 놓여 있던 젠센/RCA의 자작 3웨이 혼 시스템이었는데, 이제는 그만 문을 닫고 없어져 버렸다….

오디오 친구는 없었지만 (내가 아는 한 내 주변에서 나만이 유일하게 “오디오”가 취미였다) 아직 어린 주제에 어른 오디오 광들은 제법 만나게 되었고, 마크 레빈슨 같은 수퍼 하이엔드 기기 뿐 아니라 바이타복스며 웨스턴 일렉트릭 등의 빈티지 사운드도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 그 엉성한 자작 혼 스피커…

그러구러 고3이 되고, 음악 감상이며 오디오는 당분간 멀리 할 수밖에 없는지라 금욕과 고행의 나날을 1년 너머 보낸다. 물론 음악을 전혀 듣지 않은 것은 아니고, 골판지로 탄노이 오토그래프 모형을 만들어 삼미 4인치 풀레인지를 넣어갖고 예의 삼성 카세트 라디오에다가 연결해 책상 위에 올려놓고 들었었다... 물론 양친 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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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숙기

고3 막바지에 형의 선물로 갖게 된 JBL의 LE8T는 나에게 처음으로 관능의 자극 이상의 무엇을 전해 준 오디오 기기였다. 대형 혼 스피커만을 최고로 알고 있던 내게 8인치도 안 되는 소구경 풀레인지는 음악의 구심적인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었고, 나는 이 스피커로 클래식과 보컬을 듣기 시작했다. 역시 선물 – 돈을 지불하긴 했지만 정가의 10퍼센트만 냈으니 – 로 얻은 6B4G 싱글 앰프는 또한 직렬 삼극관이 힘차고 박력있는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고...

이걸 오래 즐기지는 못했는데, 자식이 음악을 즐기시는 어른보다 더 좋은 장치를 듣고 있기가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침 고희를 맞으신 선친께 이 시스템을 진상했다. 나중에 내 손으로 일해 번 첫 월급으로 토렌스의 턴테이블을 사서 달아 드렸는데, 선친께서 적지 아니 흡족해 하셨던 기억이 난다.

성인이 된 후 오디오 취미는 본격적으로 불이 붙어, 다종다양한 기기들을 섭렵하며 꿈속에 울리는 이상의 사운드를 추구하기 시작한다. 그 이상이란 혼의 박력과 스케일에 풀레인지의 정숙하고 단아한 맛을 함께 얻는 것이었고... 아직 자기 집을 갖지 못한 관계로 어쩔 수 없이 저렴한 소형 스피커들 – 미션의 다이아몬드, RCF의 미토 1, 굳맨의 맥심 등, 모조리 중고 – 을 사용하면서 앰프 사냥에 열을 올리는 나날이었다. 미션의 사이러스 II 로 울린 미션 다이아몬드와 쿼드의 405로 울렸던 굳맨의 맥심, 그리고 오디오 리서치 VT60으로 울렸던 RCF의 미토가 제법 근사했었지만, (앰프도 모두 중고...) 그 어느 것도 내가 꿈꾸는 이상의 소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소리가 쩨쩨하고 답답해서 종내 만족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30대에 접어들어 비로소 내 전용 리스닝 공간이 생기고, 본래 좋아하는 대형 스피커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탄노이며 JBL의 스튜디오 모니터들을 써 보기도 하고, 이런 저런 앰프들을 바꿔 들어 보기도 하던 차에 – 드디어 운명의 만남, 로더를 듣게 된다. 엔젤 오디오의 쇼룸에서 웨스턴 일렉트릭의 KS형 앰프로 울렸던 로더의 TP-1은 그야말로 근사했다. 거의 이상에 근접한 소리로, 큰 스케일에 우아함까지 겸비한 소리였으니까... TP-1은 너무나 비싸 감히 구입하지 못하고 웨스턴 앰프와 유닛만 사서 평판 배플에 달아 듣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 평판에 단 것은 달리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제대로 된 혼을 장만할 때까지 임시로 듣고자 한 것이었다. 처음으로 들은 평판의 소리, 혼과도 다르고 여지껏 들었던 어떤 종류의 스피커와도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닌가! 웅대한 스케일, 막히지 않고 시원한 음색, 깔끔하고 발이 빠른 저음. 물론 로더는 잘 알려진 대로 혼 로딩을 하지 않으면 제 소리를 내지 않고, 낮은 Q와 제한된 최대진폭으로 평판에 달아 듣는 것은 권장할 수 없는 드라이버이다. 평판은 패널 크기에 따라 일정 주파수 아래에서 어쿠스틱 쇼트가 발생, 진폭이 작은 로더를 파손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 쪽으로 경험이 없으신 분들은 절대 따라 하지 마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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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근황

근래 4, 5년간은 주로 앰프에 정성을 기울였던 것 같다. 고장나 버린 웨스턴 앰프를 눈물로 송별하고 다시금 로더에 맞는 앰프를 찾느라고 오디오 리서치, 맥킨토시, 마크 레빈슨 등등을 들어 보았지만 어느 것 하나 웨스턴의 발 끝에도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한 때 LE8T를 드라이브하던 5와트 출력의 6B4G 싱글만도 못한 것이었다. 기성 제품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손수 만드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고, 웨스턴을 고칠 재주가 없어 내보내는 가슴아픈 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자작 공부를 제대로 하기 시작했다.

참담한 실패를 거듭하며 납땜기와 씨름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지식이 없으면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전자회로와 음향의 기본부터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 이 때다. PC의 발달로 과거에는 비용상 개인이 할 수 없었던 연구실 레벨의 실험과 측정이 용이해 진 것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수 년에 걸친 공부와 실험의 부산물이 있다면 측정장비들, 어느 새 한 짐이 되어버린 부품통들과 공구들, 가게를 차려도 될 만큼 모인 기판들과 드라이버들이다… 하지만 가장 소중한 수확은 사실 장비나 지식이 아니라 – 물론 지식도 소중하지만 – 일종의 지혜인데, 추구하는 사운드와 시스템의 형태가 명확해지고 범위가 좁아진 것이 그것이다. 즉, 스피커는 평판, 앰프는 직렬 삼극 진공관.

원시적이라면 원시적인 형태이지만 이로써 얻어지는 성능은 결코 현대 하이엔드 기기의 물리특성에 뒤떨어져서는 안되며, 가청주파수 대역을 최저의 왜곡과 최대의 효율로 커버할 것. 원하는 소리의 특징은 개방적이고 통쾌하면서도 품위와 절도를 잃지 않는 것인데, 혹시 다소 품위가 모자라더라도 낭랑하게 울리는 살아있는 소리는 절대 필수. 스피커는 최소한 40Hz에서 15KHz를 과도한 특이성향이나 제한 없이 재생해야 하고, 청취 위치에서 평균 100dB의 음압을 과도한 왜곡 없이 재생해야 한다. 앰프는 10Hz부터 30KHz의 대역을 갖추고 실용 음량에서 중역대의 왜곡이 0.1퍼센트 이하라야 한다, 등등이 그 개요이다.

기술적인 요구사항들이 내가 원하는 사운드의 필요조건이라면, 개방적이고 품위있는 성격은 충분조건이 되겠다. 필요조건이 만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충분조건을 논하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의미가 없다. 근래 키트형 진공관 앰프 제품들 가운데 지나치게 2차 고조파 왜곡이 많거나 대역이 좁은 설계를 종종 볼 수 있는데, 곱고 부드러운 소리를 내려는 그 의도는 이해할 수 있고 또 그런 회고적인 사운드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알겠지만 내 귀에는 불만이다. 직렬 삼극의 소리는 잘 벼린 칼날과 같이 직선적이고 날카로운 맛이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혼의 박력을 갖춘 풀레인지를 찾는 데 또한 오랜 시간과 자본을 들였다. 로더로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본 모양인데, 로더라는 스피커는 음악을 가릴 뿐 아니라 앰프도 방도 사람도 가린다. 아니 도대체 대단히 까다로운 스피커이고, 소유주의 성미에 맞추는 게 아니라 사람이 저한테 맞추기를 강요하는 면이 있다... 풀레인지로 로더에서 더 나아가고자 한다면 대단히 힘들고 돈도 많이 드는데, 그래도 최근에 입수한 수프라복스는 로더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은 대단히 우수한 스피커로 썩 만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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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장래의 계획과 희망

현재의 시스템에 기술적인 불만사항이 있다면: 포노 EQ의 출력 임피던스가 너무 높아 저역이 불안정한 점과 힘찬 느낌이 모자라는 점, 수프라복스 드라이버가 약간 짝짝이라는 점, (한 쪽이 약간 Q가 높다) 그리고 수프라복스에 급전하는 파워 서플라이가 정전압형이라는 점이다. 음질상의 불만은 저역이 무르고 다소 뭉개지는 경향, 중고역이 고상하고 점잖기는 한데 짜릿하고 알싸한 맛이 덜한 것을 꼽을 수 있겠다. 이는 앞서 말한 풀레인지 스피커의 어쩔 수 없는 제약이긴 하지만 포노 EQ와 CD 플레이어가 미비한 때문이기도 하다.

CD 플레이어는 그저 쓰기 편하고 믿음직하며 저역이 너무 날리지 않는 것을 골라 써 왔고, 지금 사용하는 레가 CDP는 거기다가 더하여 예쁜 고역으로 이름난 좋은 제품이다. 그러나 역시 보급가격의 “쓸만하고 괜찮은” 물건이므로, 현재 시스템의 성능에 비교할 때 여러 모로 처지는 것을 느낀다. 플레닛의 트랜스포트 부분은 대단히 우수한 성능이므로 그대로 쓰되 DAC를 자작하여 음질 향상을 꾀할 수 있지 않을까…

스피커로 말하자면, 로더로부터 알텍의 A-7을 거쳐 PHY-HP, 다시 현대 풀레인지의 최고봉이랄 수 있는 수프라복스를 사용하면서 느낀 것인데, 역시 두 가지 – 구심적이고 우아한 풀레인지의 미점과 박력있고 웅대한 대형 혼의 세계 – 를 한 스피커로 다 즐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상은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이상이고, 그 이상에 최대한 가까이 가고자 노력하는 과정에 재미와 보람이 있는 줄을 슬슬 느끼는 중이랄까… 대형 평판에 단 수프라복스의 스케일은 15인치 2웨이 혼형인 JBL의 L200에 결코 못지 않지만 음압감이랄까 중량감, 침투력, 대형 스피커 특유의 여유만만하고 장쾌한 울림새는 끝내 얻을 수 없는 모양이다. 이것은 엔지니어링이나 음악성의 미비가 아니라 물리법칙의 제한이므로, 풀레인지로는 여기서 멈추기로 마음먹고 있다. 장래 경제적 여유와 생활공간이 허용한다면 젠센이나 클랑필름의 필드코일 우퍼와 대형 중고음용 혼을 배플에 달아 울려보고 싶지만, 과연 그것으로 수프라복스로 달성한 풀레인지의 아름다운 음조에 비길 만큼 멋진 혼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을는지.

프리앰프는 포노 단의 설계를 변경하여 다시 만드는 김에 통도 새로 제작하고 전원부도 강화하려고 궁리 중이다. 자작할 때 앰프 통 만드는 것이 가장 골치아프고 비싸게 먹히는 부분인데, 아직 뾰족한 묘수가 떠오르지 않고 있다. 비자성체로 하고 싶지만 알미늄은 실딩이 좋지 않고 강도도 약하므로 어렵고, 철로 하자니 가공이 힘들고... 듀랄루민이나 마그네슘 알로이 절삭 가공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원체 비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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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각설하고, 나의 20여년 간의 오디오 여정은 지금 한 고비를 넘는 중이다. 나이도 나이려니와, 이제 방황과 중구난방의 삽질을 대강 접고 깊이를 추구할 때가 왔다고 느끼는 중이랄까. 사람이 깊이가 모자라면 그 사람이 울리는 음악도 깊이가 없다. 모친께서는 아직도 내가 고교시절 삽질로 만들었던 2웨이 스피커를 보관하고 계시는데, 그걸 들어보면 10대 시절의 내 모습이 고스란히 소리에 담겨 떠오른다. 지금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세련되어졌고, 둥글어졌고, 퍽 안정되었지만 - 솟구치는 정열이나 멍하게 만드는 관능, 무엇보다 순수하고 속시원한 원색의 개성은 나이와 함께 퇴색해 버렸다. 뭐, 늙어가는 거니까 그건 어쩔 수 없다 쳐도, 그 대신 원숙하고 늠름한 맛은 있어야 할 텐데...

2004/03/14 12:29 2004/03/14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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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이라고 하면 "이루어질 수 없는..." 으로 보통 형용이 되지만, 간혹 첫 눈에 반해서 무덤까지 가는 경우가 있다. 오디오 광들은 다들 첫사랑이 있는데, 대부분의 첫사랑은 스피커, 처음으로 마음을 움직이고 눈물을 따르게 만들었던 스피커이다. 나도 물론 있다. 지금 그 얘길 하려는 거다.

큰 형이 일본에서 일하고 있다가 귀국하게 되었다. 난 고3이었고... 뭐 꼭 필요한 것 있으면 사다 주겠다고 하길래, 덜컥 염치도 없이 한 부탁이 "저.. 형 아끼하바라 가시면 JBL LE8T라는 스피커 알맹이를 파는데 한 조만 사다 주세요" 였다. 불쌍한 큰형, 그게 얼마짜린지도 모르고 "응 그러마" 하였더랬다. 그게 85년 겨울이었으니까, 그 시절 가격으로 미국 현지에서 개당 200불, 일본에서는 한 조에 약 8만 엔에 팔리고 있었다. 큰 형 월급 반 가까운 금액이다. 나 같으면 가격 듣는 순간 180도 뒤로 돌아 해서 그냥 들어왔을 건데 (그러니까 동생이지) 큰 형은 없는 돈 탈탈 털어서 그걸 사 왔다! (그러니까 형이지) 그게 처음으로 내 것이라고 소유하게 된 "명품" 스피커다. 하츠필드나 하크니스도 스피커 역사상 잊혀지지 않을 스피커이지만, LE8T 역시 명기의 반열에 드는 스피커로 "명품"이라 불러 마땅하다. 이 점 아마 생각을 달리 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 "뭐, LE8T가 명기? 웃기고 있네!" 글쎄, 요 밑의 설명을 좀 읽어 보면 내가 그리 생각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쉽게도 지금은 생산 종료하고, 재고로 남아있던 것들도 2002년에 최후의 한 조가 팔림으로써 이제 더 이상 새 것은 살 수가 없다. (간혹 보수용으로 사 놓았던 유닛들을 팔려고 내 놓는 경우는 있다.) 중고는 많이 돌아다니고, 대부분 서라운드가 다 부서지고 없거나 센터돔이 푹 들어간 처참한 형상을 하고 있다. 그 상태로도 보통 10만원 이상 달라 한다. 이걸 JBL 공장에 보내 원상복구하는데 송료 포함해서 한 50만원 든다. 국내 스피커 수리점에서는 10만원 정도로 할 수 있지만 최후 수단이다. 중고라도 구해서 수리하고자 하는 분들은 빨리 해야 한다... 오리지날 부품도 언제까지나 있는 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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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8T의 역사 ]]

LE8T는 원래 D208이라는, 알텍 755를 겨냥해서 경쟁하려고 만든 PA용 스피커가 그 조상이다. 역시 원조는 웨스턴... 사실 755도 원래 PA용이다. 그러니까 알텍이며 젠센이며 JBL 모두 사실 웨스턴을 베끼고 베끼다 성공한 거라고 할 수 있다. 알텍 드라이버 중 제일로 치는 것은 288과 802인데, 288은 웨스턴 593 베낀 거고 802는 555 베낀 거고... JBL 375 역시 웨스턴 593 카피고, 175는 알텍 802 베낀 거고. D 씨리즈는 유명한 D130을 필두로 D131, D123, D208/216 이렇게 네 종류가 있었는데, 알텍의 스트레이트 바이플렉스 콘에 대항하여 커비닐리어 콘에 알미늄 센터 돔을 장비한 설계였다. 가정용으로도 팔았지만 역시 겨냥하고 있던 주 시장은 극장용과 PA 장비 시장이었다. 이들 스피커들은 당시 드물었던 (비싸니까) 알미늄 리본 보이스코일을 채용한 것으로 되어 있어 특기할 만하다. 특히 D208과 D216은 소구경 페이징 스피커 - 백화점 천장이나 지하철 역 - 로 쓰도록 만든 것으로, 음성 대역의 충실하고 정확한 재생에 주안점을 둔 설계이다. 755처럼 납작하게 만든 것도 씰링 콤파트먼트에 잘 들어가라고 그렇게 설계한 거고... 아래 사진이 D20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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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130이 펜더 기타 앰프에 들어가는 바람에 엄청나게 팔린 것 처럼, 이 D208은 그 후 LE8이란 모델로 발전하여 이름난 녹음기 메이커 암펙스에 모니터 스피커로 납품되어 명성을 떨치게 된다. 오리지날 208은 거의 변경없이 프로용으로 계속 살아남아 2115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208과 LE8이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서라운드가 린넨에서 스티로폼으로 바뀐 것이다 (다른 LE 씨리즈 드라이버들도 이 즈음 다 폼 서라운드로 바뀐다. 폼 서라운드는 가볍고 공진 흡수 효율이 좋아 대음량에서 디스토션이 낮다는 장점이 있다.) 암펙스의 요구사항에 맞추느라고 변종이 많이 나와서 LE8-2, LE8-6 등의 여러 종류가 있었다. 나중에 가정용으로 개발한 랜서 44에 들어가는 모델부터는 아쿠아플러스라고 JBL 특유의 미백색 댐핑재를 발라 나오게 되고, LE8T로 명칭이 바뀌고, 나중에 자석이 알니코 5에서 페라이트로 바뀌면서 명칭이 다시 LE8T-H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콘 프로파일, 알미늄 리본 보이스코일 등은 원래 그대로 변경된 적이 없다.

[[ LE8T의 특징과 매력 ]]

이 드라이버는 풀레인지, 그러니까 단발로 전대역을 재생하는 설계이다. 물론 불가능하다. 보통 풀레인지는 그래서 저역을 잘 하든지 아니면 고역을 잘 하든지 둘 중 하나다. LE8T의 경우에는 저역이 장기다. 6.5인치 (8인치라고 하지만 실제 콘 구경은 7인치도 안 된다) 소형 스피커로서는 믿을 수 없는 저역을 내는데, 통 설계에 따라 30Hz까지 플랫하게 나오도록 할 수 있다! 하지만 윗쪽으로는 아무리 잘 봐 줘도 10KHz가 고작. 그런데 이게 바로 천재의 솜씨가 나오는 부분인데, 그 10KHz밖에 안 나오는 대역으로 하도 솜씨있게 밸런스를 잡아 놔서 마치 훨씬 더 위로 좍 나오는 것 같이 착각하게 된다.

고역의 독특한 광채, 로더나 텔레풍켄과는 많이 다른 LE8T의 액센트는 바로 알미늄 센터돔이 부리는 재주이다. 이 알미늄 돔은 폼으로 달아 놓은 것이 아니다 (보통 메탈 센터돔 달린 스피커들은 그냥 폼이다) - 보이스코일 포머에 직접 연결되어 있어서 인덕티브 커플링이라는 현상이 발생, 마치 돔 트위터처럼 동작한다. (다이아톤의 PM610도 그렇다. 천으로 만든 더스트캡 안에 듀랄루민 돔이 들어 있다.) 이 "트위터"의 구경이 2인치나 되는 바람에 고역이 10K 까지 밖에 안 나오지만, 인덕티브 커플링 덕택에 아주 높은 주파수에서도 임피던스가 거의 플랫하다. 플랫한 임피던스 덕택에 진공관 앰프로 울리기가 아주 좋고, 청감상 고역이 더 뻗는 듯이 들리게 된다. 가벼운 음악 듣는데는, 특히 대중음악이나 보컬 듣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현악을 들으면 비로소 뭔가 빠졌다는 게 표시가 난다...

알미늄 리본 보이스코일, 더우기 그게 2인치나 되는 대구경이고 게다가 언더헝 (자속 갭보다 보이스코일이 얕은 걸 말하는데 굉장히 비싸게 먹히는 설계임) 으로 되어 있다. 언더헝인데도 대진폭형이고, 대진폭형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자속 갭이 좁고 정밀하다. 이런 컨셉의 풀레인지가 또 있나? 오리지날로는 없다. 포스텍스 200씨리즈는 갖다 베낀 LE8T 카피니까 언급할 가치도 없고, 비교적 비슷한 트루소닉 80F가 있지만 여기저기 설계가 차이나는 점이 많다. LE8T보다 뛰어난 풀레인지는 그 외에도 많이 있지만 아이디어가 완전히 다르다. 그러니까 역사적인 명기라 하는 것이다.

[[ 그리고... 단점들 ]]

단점, 또는 한계도 물론 있다. 일단, 애사당초 무지 비싼 초 고급 풀레인지로 만든 게 아니라는 점 염두에 두어야 한다. LE8T는 실용적이고 쓰기 편한 근접 모니터용, 혹은 페이징 용이라는 설계 의도에서 나온 드라이버다. 로더처럼 원래 비싸고 원래 고급인 음악감상용 풀레인지와는 계통이 다르다는 거다. (로더의 상급기종들은 처음 나올 때부터 탄노이보다 비쌌다)

  • 단점 1. 위에서 말한 대로, 고음이 뻗지 않는다 -- 지향성도 나쁘고. 섬세 우미한 톤, 광대한 음장감, 초정밀 해상도, 이런 건 못 한다.
  • 단점 2. 콘 구경이 작으면서 진폭을 크게 잡아 놓았기 때문에, 대음량재생을 하게 되면 고역이 절렁절렁거린다. 인터모듈레이션 디스토션이라 하는 것인데, 큰 소리 내라고 만든 스피커는 아닌 셈이다.
  • 단점 3. 능률이 89dB로 낮다. 일반적인 6.5인치 홈 하이파이 스피커보다는 한결 높은 능률이지만, 역시 2A3이나 45 같은 싱글 앰프로는 울리기 힘들다. 최소한 10와트는 필요하고, 한 30와트 되어야 소리가 빠지기 시작한다.
  • 단점 4. 캐비닛을 베이스 리플렉스나 패시브 래디에이터 형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밀폐형이나 혼은 안 된다) 통이 제법 커진다. 75-80리터 정도 되어야 제 소리가 난다. 그 정도면 가정용으로서는 최대급이다.
  • 단점 5. 이건 꼭 단점이랄 수도 없고... LE8T 혹은 JBL 스피커 일반의 성격이라 하는 게 맞을 터이다. 즐겁고, 명쾌하고, 편하고, 알기 쉽고, 기분 좋다. 그러나 깊이가 없다. 사람으로 치면 명랑하고 성격좋고 매너좋은 친구라고나 할까. 그러나 아쉽게도 인생의 깊은 맛을 아직 알지 못하고, 정말 어렵고 힘들 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은 아닌 거다. 그래서 음악도 가볍고 명랑한 음악은 썩 잘 하지만 비극이 깃들어 있고 영혼의 깊이를 재는 음악에는 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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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인 까닭에, 이미 상용하는 스피커가 아니라 고이 모셔두고 어쩌다 한 번씩 향수에 젖어 울려보는 스피커인 까닭에, 온갖 단점들은 용서되고 이쁜 점만 부각된다. 어쩔 수 없다, 뭐 바로 그런 게 첫사랑이니까.

2004/03/09 01:05 2004/03/09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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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프라복스 인클로져 디자인/실험에 거의 1개월을 소비한 후, 마침내 도달한 시스템이 이거다. 역시 평판형, 전에 쓰던 배플을 그냥 쓰고 베이스를 다시 만들어 높이를 더하고 뒤로 조금 더 누웠다. 날개가 아크릴에서 미송 집성목으로 바뀌었고...물론 수프라복스 추천 디자인인 트랜스미션 라인도 시도해 봤지만 잘 안 되었다. 오리지날 디자인은 거대한 냉장고형 쿼터웨이브 튜브인데, 내 방에 들여다 놓기가 좀 거북한 싸이즈며 무게이다. 그걸 약간 간략화해서 소형으로 만들어 보았는데, 그게 아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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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만드는 과정. 재료는 흔해 빠진 19미리 MDF, 조립 방식은 역시 가장 기본적인 벗 조인트, 피니시는 참나무 무늬목 위에 4층 하이글로스 바니쉬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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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매스 로디드 트랜스미션 라인이라고 트랜스미션과 베이스리플렉스의 짬뽕이다. 작은 크기로 아주 낮은 저음을 낼 수 있는 장점이 있는데, 수프라복스하고는 상성이 좋지 않아 결국 포기했다. 수프라복스는 초경량 무빙매스 - 7그램 - 에 엄청 높은 Qms를 가진 드라이버다. 이런 종류들은 어쿠스틱 로딩에 민감해서 조금만 튜닝이 어긋나도 소리가 망가지는 경향이 있다... 옛 텔레풍켄이나 사바 같은 유닛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라우더도 무빙매스가 아주 가볍지만 그렇게 민감하지는 않은 것이, Q가 아주 낮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수프라복스는 전자석 드라이버다. 이 전자석은 발열이 엄청난데, 트랜스미션 라인은 댐핑을 올리기 위해 흡음재를 많이 쓴다. 이렇게 열이 많이 나는 드라이버에는 당연 좋지 않은데, 뜨거운 드라이버를 식혀야 하는데 보온을 하는 셈이니까. 나이 드신 프로 음향 기사분들 얘기로는 과거 극장에서 널리 쓰던 젠센이나 웨스턴의 필드코일들은 과열로 발화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배플 시스템은 여러 가지 장점이 있지만, 싸이즈와 형태를 잘 선택함으로써 대단히 자연스럽고 과도특성이 좋은 저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수학적으로 스피커는 하이패스 필터로 볼 수 있는데, 저음의 과도특성은 이 필터의 차단 특성으로 결정된다. 과도특성이 좋은 저음은 붕붕거리지 않고 깔끔하며 박력이 있다. 킥드럼 같은 악기가 둥 둥 이렇게 소리나는 게 아니라 가볍고 마른, 탁 탁 하는 소리를 내는데, 그러면서도 가슴을 치며 육박하는 중량감과 어택감을 얻을 수 있다 - 진짜 드럼 같이. 밀폐형이 상자 스피커 중에서는 제일 나은 과도특성을 보이고, 이론상 최고의 과도특성을 보이는 게 베이스 혼이다. 하지만 혼은 잔향이 길고 잘 만들기가 어려우며, 적어도 50Hz까지 내려면 크기가 감당못하게 커진다. 현실적인 싸이즈에서 혼보다 더 과도특성이 좋은 형태가 바로 오픈 배플, 즉 평판형이다. 위의 평판은 1미터 높이에 1.52미터 폭으로, 흔히 쓰는 황금비가 아니고 어쿠스틱 레이쇼라고 음향적으로 이상적이라고 하는 비율로 되어 있다. 이 싸이즈에서는 -3dB 포인트가 약 70Hz이고, 그 이하에서는 -12dB로 차단한다. "겨우 70Hz?" 하지만 차단특성이 매우 완만하기 때문에 50Hz에서 여전히 상당한 양의 저음을 뽑아내 준다. 실용 가능한 저역의 차단점은 -10dB지점인데, 그것이 위의 평판과 수프라복스의 조합으로는 41Hz, 정확히 어쿠스틱 베이스의 최저현 주파수이다.
배플의 장점은 대단히 많지만 그 중 두 가지만 더 들면: 모든 상자형 스피커의 숙명인 디프랙션 로스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상자형 보다 약 6dB 소리가 크다. 가만 놔둬도 102dB의 초 고능률을 자랑하는 수프라복스이므로, 배플에 달면 약 105dB (이론상 6dB지만 현실적으로는 3dB 정도 게인이 있다) 의, 혼에 필적하는 능률을 얻을 수 있다. 또 한가지 장점으로는 배플 스피커는 디프랙션이 안 생기므로 음장감도 대단히 좋다.

그럼 단점은 없나? 없을 리가 있나, 당연 있다. 일단 걷보기로 무지 크다. 마누라들이 싫어한다. (사실은 뒷 폭이 없기 때문에 큰 게 아니지만) 또, 배플은 싸이즈의 제한으로 컷오프 주파수의 1/2 지점에서 어쿠스틱 쇼트가 발생, 그 밑으로는 소리가 아예 나지 않는다. 초저음은 흔적도 없다는 거다. 게다가 잘못하면 스피커 유닛의 최대진폭을 넘어버리는 수가 있으므로 음량도 너무 크게 올리지 못한다. 어쿠스틱 쇼트는 이점 전기회로의 쇼트와 비슷해서 스피커에 음향적으로 부하가 걸리지 않게 되어 보이스코일에 최대전류가 흐른다. 수프라복스는 8밀리미터의 대진폭형이므로 상관없지만 로더같이 1미리밖에 안되면 진짜 조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배플을 잘 만들지 않으면 이놈이 벌렁벌렁 공진한다. 이상적인 배플은 최대강도, 무게 제로, 내부손실 무제한이 되겠지만... 그런 물질은 세상에 없으므로, 현실적으로는 이 공진이 음악 듣는데 방해가 안 되도록 솜씨좋게 감추는 것이 필요하다. 공진 주파수를 아주 높게 만드는 방법이 있고 (가볍고 단단한 물질 사용) 또는 컷오프 주파수 아래로 내리는 방법이 있다 (비중이 높고 대단히 무른 물질 사용) 두 가지를 섞으면 제일 좋은데, 그래서 저 위 사진의 배플은 공진의 기계적 강도가 가장 높은 부분에는 아주 가볍고 아주 단단한 자작나무 합판을, 공진의 진폭이 가장 큰 주변부분은 비중이 높고 무른 미송을 쓴 것이다.
배플의 주변부는 이렇게 일부러 펄럭거리게 만드는 것이므로, 바닥에 닿아서는 안 된다. 무슨 수를 써서 허공에 떠 있게 만들어야 한다. 사실 이상적으로는 배플 전체가 허공에 떠 있어야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므로, 바닥에 닿는 부분이 최소면적이면서 진동을 전달하지 않는 구조가 좋다. 보통 바퀴를 많이 달지만 내 경우는 단풍나무로 만든 세모꼴 웨지를 써서 배플의 중앙부만 바닥에 선으로 닿아 있도록 만들었다.

아, 제일 중요한 것. 소리, 끝내준다. 웨스턴으로 울린 알텍 A-7에 비교하자면... 역시 침투력이나 여유만만의 호쾌함에서는 밑지지만 그 외 섬세함, 나긋함 등에서는 한 수 위이고, 스케일은 놀랍게도 비등비등하다. 자, 이러면 일단 성공이라고 자축해도 되겠지... 하지만 이 성공은 한 계단 위의 가능성을 엿보게 하였기 때문에 마음을 놓고 머무를 수가 없다. 즉, 풀레인지가 아닌 제대로 된 혼 시스템을 배플에 장착하면 대체 어떤 소리가 날까? 라는 것이다. 알텍의 A씨리즈, 웨스턴의 와이드레인지 시스템, 그리고... 스피커의 영원한 왕자 클랑필름, 모두들 다름 아닌 배플에다 혼을 달아 완성한 시스템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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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8 21:32 2004/03/08 2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