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레인지 팬으로서 새로운 드라이버를 만나는 것은 대단히 익싸이팅한 일이다.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니까 더 그렇다. 새로이 풀레인지를 설계해서 시장에 내 놓는 나라는 이제 일본과 프랑스 뿐인 듯하다. 일제 풀레인지들은 소리가 대충 뻔해서 그리 큰 흥미가 없지만, 프랑스 제품들은 재미있는 물건이 많다. 오랜 전통의 오닥스, 내가 최근까지 사용했던 PHY-HP, 신흥 업체인 페르땡, 그 외 무수한 가라지 업체들.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신개발 풀레인지는 역시 프랑스의 웨스턴 일렉트릭 또는 BBC라 할 수 있는 RTF - 라디오 에 뗄레비씨옹 프랑세즈 - 의 부활판, 수프라복스 215-200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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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수프라복스가 방송용 스탠다드 모니터로 RTF에 납품한 215RTF64 이다. 뒤가 둥그름한 것이 알니코 자석 버전이고, 길다란 통처럼 생긴 것이 필드코일 (전자석) 버전이다. 215-RTF64는 60년대 이래 프랑스의 스튜디오에서 널리 사용되어 왔는데 모델넘버 215는 유닛 구경을, 64는 개발연도를 의미한다 (215밀리미터, 1964년) 사진 보면 알 수 있지만 옛 클랑필름 디자인과 상당히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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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RTF를 디자인한 사람은 몇 년 전에 은퇴하고, 지금은 새로운 주임 기사 겸 오너가 회사를 이끌고 있다고 한다. (Msr. Guy란 양반이다.) 이 양반이 고전 드라이버인 215RTF를 현대에 부활시키자는 아이디어를 품고 수 년에 걸쳐 고심한 끝에 만들어 낸 것이 위 사진의 215-2000 이다. 모델넘버 2000은 2000년을 뜻하고, RTF 부활의 연도를 나타내는 것이란다. 215-2000은 오리지날 64와 마찬가지로 알니코 자석 버전과 필드코일 버전 두 종류가 있다.

2000년 신 개발이니까 당연 소문은 벌써 들었지만 실물을 보기는 올해 처음이다. 수프라복스의 미국 지사가 금년 1월에 생겨서 - 하필 우리 누나 집 바로 옆에 - 방문하게 되었다. 거기서 옛날 RFT의 요즘 버전과 새로운 2종류의 215를 들을 수 있었다...

거기 가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엄청난 가격에도 불구하고 (로더 PM4A보다 두 배 비싸다) 덜렁 집어온 것이 215-2000 엑씨따씨옹, 그러니까 필드코일 버전이다. 전시실에서 데몬스트레이션 하고 있는 유닛을 조금 헐하게 살 수 있었지만, 그래도 잠시 머리가 아득해지는 가격이었다.

PHY-HP보다 여러 단계 우월한 성능, 로더나 포스텍스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음, 풀레인지 답지 않게 웅대한 스케일. 전자석 드라이버는 길드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아직 뭐라 딱 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 현재 상태로도 상당히 만족스럽다. 필드코일 특유의 유유하고 호연자적한 음이 가장 특기할 만한 장점이다. 100dB을 가볍게 넘는 고능률도 놀랍지만, 풀레인지를 사랑해 온지 10여년, 서브우퍼나 트위터 생각이 전혀 안 나는 유닛은 이 215-2000이 처음이다.

딱 한 가지 불만이 있다면, 엄청난 돈을 써 버렸기 때문에 보유하고 있는 드라이버들 태반을 내다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PHY-HP와 망가 드라이버, 로더 PM7A, JBL D-123 등등을 팔려고 내 놓았고, 망가 드라이버는 벌써 새 주인을 찾아갔다.

JBL에서 알텍으로 갔다가 라우더로, 다시 PHY-HP를 거쳐 이제 많은 사람들이 현대 기종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다는 수프라복스에 이르렀다. 여기서 더 나가려면 웨스턴 728이나 클랑필름 405로 가야 할 것이지만, 그런 외계 드라이버들은 너무나 비싸기 때문에 손이 닿지 않을 가망이 높다. 자세한 사용기는 이 다음에, 좀 더 들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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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2/25 13:25 2004/02/25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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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비는 쿠즈마라는, 슬로베니아에 소재한 작은 메이커에서 제조하는 텐테이블이다. 쿠즈마는 창업 이래 오직 턴테이블과 톤암만 만들어 온 회사로, 회사 이름인 쿠즈마는 창립자이자 오너이며 수석 엔지니어인 쿠즈마 박사의 이름을 딴 것이다. 내가 쓰는 스타비는 쿠즈마의 데뷔 모델로 1982년에 첫 발매, 85년에 마이너체인지된 버전 2. 워낙 기본 설계가 단단해 20년 동안 단 한 번의 버전업을 했을 뿐이다.

스타비는 정통적인 서스펜디드 벨트 드라이브 형식이다. 일반적인 서스펜션은 3점 지지의 스프링 서스펜션 (미국 AR 사가 오리지네이터이다 -- 토렌스가 유행시켰고) 이지만 스타비의 서스펜션은 4점 지지의 스프링 + 실리콘 댐핑이다. 공진 주파수는 3.5Hz이고, 이 서스펜션이 워낙 효과가 좋아 무거운 리드 (참나무로 되어 있는데다 진짜 유리를 끼어 놓아 무지하게 무겁다) 를 쾅 닫아도 바늘이 튀지 않을 뿐 아니라 스피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 서스펜션으로 합계 20킬로에 달하는 회전계를 달아매 놓았다. 플린트와 몸체 부재는 모두 통 참나무.

서스펜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메인 베어링이다. 스타비의 베어링은 흔히 쓰이는 원포인트가 아니라 다이내믹 밸런스를 취한 5점 지지 베어링. 턴테이블은 평소에는 약간 비스듬하게, 좀 헐렁하게 스핀들에 꽂혀 있다가 모터가 회전을 시작하면 자이로스코프 효과에 의해 똑바로 서게 된다. 베어링은 텅스텐 카바이트이고 플래터는 4킬로그램 짜리 알미늄 합금을 고무로 댐프한 것이다.

스타비는 전원공급장치가 기본으로 따라오는데, 이 전원이 또 독특한 것이다. 모터는 일반적인 24극 100V 싱크로너스 교류모터이지만 (나는 직류 모터, 24볼트짜리 장난감 교류 모터, 배터리 구동 등등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모터를 일반 상용전기로 구동하는 것이 아니라 정현파를 생성해서 그것을 A급 밸런스 앰프로 증폭, 그 출력으로 모터를 돌리는 것이다. 정현파의 주파수는 0.4퍼센트 단위로 조절 가능하기 때문에 턴테이블의 속도 미조정은 거의 완벽하게 맞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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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은 오리지날인 스토기를 쓰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지만 스토기는 워낙 비싸다. 스타비와 스토기를 함께 사면 600만원 가량 하는데, 나한테 600만원이 있으면 좀 굶어서 EMT를 사겠다. 아무 턴테이블에나 잘 맞고 (린 제외) 개성이 적으며 중용의 음색을 지닌 암을 찾다가 중고로 싸게 산 것이 지금 장착되어 있는 SME 309. SME는 3012와 씨리즈 VI 이 진짜라고들 하지만 역시 너무 비싸고, 게다가 스타비에는 롱암을 달 수 없다. 309는 씨리즈 VI의 염가판 (이라고 해도 새 걸로 사면 200만원이 넘는 고가) 이지만 제법 훌륭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씨리즈 VI 이 다이내믹 밸런스에 원피스 암인 데 대해 309는 스태틱 밸런스이고 헤드셸이 분리되는 투피스 구조인 점. 그 외에는 동일한데도 가격은 2배 이상 차이나니...

카트리지는 클리어오디오의 아우룸 베타, 오토폰의 XMC-5, 슈어의 V-15를 바꿔가며 쓰고 있다. 지금 꽂혀 있는 것은 오토폰. 셋 중 클리어오디오가 상용 카트리지이고 또 가장 마음에 들지만 친구가 빌려가더니 돌려 줄 생각을 안 한다...

참, 가장 중요한 것: 그래서, 종합적으로, 소리는? 해상도, 스피드, 이런 것들은 양보할 수 있다. 그러나 진하고 순박하며 고운 음색, 오버하지 않는 점잖음, 이때다 싶을 때 나오는 무시무시한 중량감과 박력, 이런 점들이 양보할 수 없는 나의 리스닝 포인트들이고, 스타비는 그런 부분들을 잘 한다. 좀 어둡고 좀 어리숙하며 좀 둔하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2003/06/16 00:23 2003/06/16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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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클랑필름 오이로노르다. 여러 종류의 구성이 있지만 이 그림의 오이로노르는 15인치 필드코일 우퍼 4대를 프런트로딩 혼에 달고, 컴프레션 드라이버 Kl.L301 + 트랙트릭스 사각 혼 Kl.Z301를 2대 (설치여건에 따라 4대까지) 고역용으로 쓰며, 이것들을 다시 가로세로 4. 5미터 배플에 붙인 구성이다. 이 구성으로 1와트당 115dB를 쏟아낸다. 일반 하이파이 스피커로 이 레벨을 내면 백중 구십구 외마디 비명과 함께 푸시식 승천이고, 난다 긴다 하는 프로용 스피커로도 힘든다... 수 백 와트를 넣어야 비로소 비슷하게 날 것이다.

클랑필름 하면 빈티지 애호가들에게는 역시 극장용 스피커들과 진공관들이 관심의 (또는 숭배의) 대상이다. 클랑필름은 독일의 웨스턴이라 할 수 있는 회사로 1928년 아에게, 텔레풍켄, 할스케, 지멘스가 함께 설립한 영화산업 토탈솔루션 컨소시엄이다. 영화 산업이나 진공관, 스피커 등의 역사를 다루는 어떤 책에도 반드시 클랑필름이란 이름이 등장한다. 웨스턴이 프런트로딩 혼과 베이스 리플렉스의 복합 인클로져 (알텍의 A 씨리즈는 본래 웨스턴의 컨셉)와 섹트럴 혼 등의 기술 개발로 스피커 역사에 남는다면 클랑필름은 세계 최초의 정전형 스피커 개발, 더우기 그 정전형을 극장용으로 썼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 35밀리 필름에 음성을 자기기록하는 획기적인 마그네토그라프 기술 등으로 불후의 명성을 쌓았다.히틀러 집권시의 독일에서 괴벨스의 지휘 아래 무수한 프로파간다 영화 제작의 하수인이었고 2차대전 종전 후에도 지멘스 산하 브랜드로 60년대 중반까지 제품을 생산하였지만 1983년 키노톤이라는 회사에 브랜드가 매각되었다. 지금은 다 없어지고 그 이름만 전설로 남아 있다.

클랑필름의 극장용 스테이지 스피커는 위의 그림에 나온 오이로노르 외에도 비오노르, 오이로딘(유러딘) 유로파 등 여러 종류가 있다. 모니터용, 휴대용으로 작은 스피커들도 개발했었지만 스테이지 스피커들에 비하면 명성이 희박하다. 가장 작은 오이로딘은 15인치 우퍼(Kl.L401) 와 4인치 컴프레션 드라이버 Kl.L301 (또는 302) 의 2웨이를 2미터 배플에 단 것이다. 오이로딘은 비교적 소형이라 국내에 많이 도입되어 있으며 보통 천만원에서 이천만원 사이에 거래되고 있다. 아래 사진은 오이로딘을 배플에서 떼어낸 상태다 (보통 이 상태가 오리지날이고 배플은 만들어 단다. 사진의 사각 혼 앞에 달린 음향 렌즈는 대단히 귀해 찾기 어렵다고 한다. 독일에서 복각품을 제조해 판매하는 업체가 있는데, 복각품도 호되게 비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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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력 음압 110dB의 비오노르는 국내에 딱 3대가 입하되었다고 한다. 황인용씨가 하나 갖고 있다고 하고 또 일산의 누군가가 한 대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또 한 대는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지 모르겠고... 부품을 구해 복각한 비오노르는 그 외에 많이 있을 것이다. 오이로노르는 어마어마한 크기 때문에 집을 새로 짓지 않는 한 일반 가정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비오노르와 오이로노르는 글자 그대로 부르는 게 값이다. 비오노르는 오이로노르의 소형판으로, 유명한 14인치 풀레인지 Kl.L405 2대를 프런트로딩 혼에 달고 kl.L301 혹은 302 컴프레션 드라이버+혼을 그 위에 하나 또는 둘 설치한 2웨이다. 배플 크기는 2미터 X 3미터. 비오노르는 최근에 독일 하이파이 쇼 및 라스베가스 CES에 등장해서 주목을 받으며, 딕 올셔 등 여러 평론가들로부터 최고의 사운드로 호평을 받았다... 개발된지 반세기를 넘긴 스피커가 말이다. 아래 사진이 2003년 CES에 등장했던 혼 하나짜리 비오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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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컴프레션 드라이버를 뒤에서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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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들어 본 스피커 중 최고는 클랑필름 오이로딘이었다. 그런데 많은 고참 오디오파일 분들께서 오이로딘은 비오노르에 상대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내 평생 오이로딘도 손대 볼 가망이 없는데 하물며 저 괴물같은 비오노르야... 하지만 꼭 한 번 들어보고 싶다. 과연 얼마나 대단하길래, 꿈같은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는 저 오이로딘이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최상급기 오이로노르는 도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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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랑필름 정보 웹싸이트

2003/05/05 11:59 2003/05/05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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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스피커는 만원 이하 싸구려로부터 수십만원 넘는 5.1채널 고급품까지 많이 있다. 나는 쭉 보스의 101과 AM3을 써 오다가 (멀티채널은 싫어하기 때문에 5.1은 필요 없음) 이번에 새로 하나 장만했다 - 제넬렉 1029A.

홈 스튜디오나 미디어 프로덕션 쪽으로 약간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많이 쓰이는 니어필드 모니터들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어느 스튜디오나 구색으로 다 갖추고 있는 야마하 NS10이나 Auratone 같은 것들로부터, 요즘 널리 쓰이는 JBL, Behringer, K&K, ATC 등등... 하지만 적절한 가격과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는 유연성, 기동성 등을 두루 고려할 때 내게 딱 맞는 "이거다!" 싶은 제품은 이것 하나.

파워앰프 내장(그것도 한 쪽에 2대씩 바이앰핑)이고, 24bit/96Khz D-A 컨버터까지 내장하고 있다. 인클로저는 다이캐스트 알미늄이고, 한 손으로 못 들 만큼 무겁다. 단점이라면, 하여튼 4인치 우퍼 탑재의 작은 제품이다보니 저음이 65Hz까지밖에 안 나온다는 거다. 이퀄라이저를 내장하고 있고 또 1미터 내의 니어필드에서 컴퓨터용으로 쓰는 거기 때문에 큰 상관은 없지만... (전용 서브우퍼가 있지만 100만원을 넘는 가격. 아무리 업스케일 컴퓨터 스피커라지만 합계 200만원 이상이면 좀 너무하다)

제넬렉은 프로페셔널 오디오 쪽으로는 유명한 메이커지만 민수용품 시장에는 아직 진출하지 않았다. 이 제품은 용산에 가면 구입할 수 있는데, 물론 컴퓨터가게엔 없고 프로오디오 전문점에 가야 한다. 컴퓨터 스피커로 최고급 알텍이나 캠브리지 등을 구입하려 하는 분들, 조금 더 주고 제넬렉을 트라이해 보길 권한다. 스튜디오 모니터로 쓰이는 만큼 정밀한 음장, 레퍼런스급의 충실도, 내구성, 안정성 등 제반 성능이 압도적이고, 음색도 곱다. 소형 스피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어쿠스틱 에너지의 AE-1 시그너처... 만큼 상큼하진 않지만, 그에 유사한 성격의 음색이다.

일반 컴퓨터용 스피커, 아무리 수십만원 하는 고급품이라도 실효출력이 10와트 넘어가는 제품 없다. (팜플렛에서는 수백와트라고 떠들지만 말도 안 되는 거짓말) 제넬렉 1029는 DIN 규격으로 RMS 75와트, 피크값은 100와트 넘어간다. 볼륨을 계속 올리고 싶어지는 다이내믹한 재생은 참 일품이다...

2003/04/17 10:54 2003/04/17 10:54

턴테이블 쓰시는 분들이 많이 줄었다. 미디어의 주류가 CD로 바뀐지 벌써 20년이 지났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누가 뭐래도 CD는 미디어 민주화에 크게 공헌한 우수한 매체이다. CD가 비닐 레코드보다 음질이 나쁘다는 것도 옛말이다. 최신 우수녹음 CD들과 요즘 나오는 고급 플레이어들, 특히 잘 만든 수퍼오디오 CD나 DVD-Audio Disk들은 깜짝 놀랄만큼 소리가 좋다. 업샘플링을 거친 CD 소리도 많이 좋아졌다.

하. 지. 만.

나는 아직도 주로 비닐 레코드를 듣는다. 우선 소리가 정말 기가막힌 CD나 SACD 플레이어들은 여전히 기가막히게 비싸다. 모든 CD가 다 음질이 좋은 것도 아니다. 특히 파퓰러 음악 쪽은 갈 수록 음질이 개판이 되어간다는 인상이고, 클래식 쪽으로는 타이틀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클래식과 블루스 - 내가 즐겨듣는 - 아날로그 레코드의 카탈로그는 1970년대에 이르러 이미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태좋은 레코드들을 중고 레코드가게나 동네 방송국 따위에서 헐값으로 대량 구입하는 재미도 보통이 아닌지라, 아예 클래식은 취급도 하지 않는 CD Trade 따위에서 시간 낭비할 생각이 들지 않는 거다. 그리고 음질 좋은 아날로그 디스크들은 평판이 확실하게 나 있기 때문에 모험을 할 필요도 없고.

"아닐로그는 수명이 있지 않나?" 내가 죽을 때 까진 염려 없다. 청소와 보관만 신경쓰면 음질 열화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레코드는 튀잖아?" 역시, 잘 간수하고 주의하면 튀지 않는다. 레코드의 간수, 청소, 바늘 선택과 관리 등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쓰기로 하고, 오늘은 역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레코드 플레이어, EMT 930st를 소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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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T는 원래 프로용 방송장비 제작업체로 1946년 독일에 설립된 회사다. 설립자는 W. 프란쯔 박사이고, 프란츠 박사 사후 바코 EMT라는 프로용 전자제품 / 의료기기 메이커에 매각되었다가 2003년 다시 EMT Studiotechnik이라는 회사에 넘어갔다. 지금 바코 EMT는 음향관련 산업에는 관여하지 않지만 바코 제 써비스부품은 아직도 많이 돌아다니고, EMT Studiotechnik의 현행 신제품은 카트리지에 국한되어 있다. EMT 턴테이블은 세계 전역의 방송국에 하도 많이 퍼져 있어서 중고를 구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다. 프로용이기 때문에 써비스만 제대로 해 주면 수십 년 문제없는 튼튼한 제품이다.

EMT 턴테이블은 930 외에도 948, 938, 950, 927이 있지만 927은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데다가 너무 크고 무겁고, 950도 너무 크다. (장정 네명이 겨우 들 수 있다!) 948과 938은 소형이지만 소리가 930보다 못하다는 평이다. 927이나 950을 최고로 치는 애호가들도 많이 있는데 아무래도 930의 명성에 가려서인지 덜 유명한 것 같다.

930은 모노시절에 개발되었다가 나중에 스테레오 이퀄라이저와 카트리지를 탑재하면서 마이너체인지되어 930st로 불린다. 전용 카트리지인 TSD-15는 지금도 신품을 구할 수 있는데, 많은 분들이 구형 프란츠TSD-15가 신형인 바코TSD-15보다 낫다고 한다. 930의 기술적인 특징은 육중한 턴테이블을 초강력 모터로 아이들러 구동한다는 데 있다. EMT에서는 950이나 938처럼 다이렉트드라이브 턴테이블도 만들었지만, 역시 아이들러 드라이브의 소리에 어떤 묘한 매력이 있는 것인지 927이나 930만큼 명성이 높지 않다. 왜 벨트로 하지 않았느냐... 벨트는 코깅과 이니셜 스태빌리제이션 딜레이라는 문제점 때문에 프로용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이들러 드라이브는 럼블이란 문제점이 있지만, EMT의 럼블은 -70dB로 거의 들리지 않는 수준이다.

완전히 개박살난 EMT는 현재 한 150만원 선에서 구입이 가능하다. 상당히 깨끗하고 쓸 만한 EMT 중고는 한 5-600만원, 극상품은 약 800-1500만원 선이다. 새거라고 파는 EMT930st도 있는데, 새것이 아니고 90년대에 바코에서 소량 공급했던 써비스부품을 조립한 것이다. 극상품 EMT930st는 독일 현지 가격으로 8000유로 정도에 아직 소량이 유통되고 있다. 927의 가격은 잘 모르겠는데, 아마 부르는 게 값일 거다.

소리가 얼마나 차이나냐고 묻는다면... 지금 아날로그 재생의 레퍼런스 중 하나인 린 LP-12를 최신 최고 버전으로 구입하면 약 800만원 정도 든다. EMT에 비교하면... 음, 비교가 되지 않는다. 린 한테는 불쌍한 얘기지만... 가라드 301보다도, 토렌스 124 보다도, 반 덴 헐이 레퍼런스로 쓴다는 테크닉스 SP1000 mkII 보다도, 단연 뛰어나다.

이런 천문학적인 가격의 기기를 왜 소개하느냐 하면... 아날로그 재생의 한 극점에 도달했던 제품이고, 내 꿈에 자주 등장하며, 들어는 봐도 평생 가져볼 수는 없는 동경의 대상인 동시에, 흑마술 같은 냄새가 안 나는 제대로 된 엔지니어링의 표본과 같은 기계이기 때문이다. 나는 저렇게 비싼 제품을 구입할 수 없지만, 내가 쓰는 기기들은 최소한 "제대로 된 엔지니어링"의 산물이기를 원한다. 다음 기회에, 나의 턴테이블도 소개하겠다... 스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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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tures courtesy of Sr. Stefano Pasini.

2003/02/24 11:33 2003/02/24 11:33

나는 소수인 오디오 매니어 중에서도 아주 소수파에 속하는 사람이다.

무슨 취미든 매니어 소리를 듣기 시작하면 일단 그 자체로 소수파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매니어들은 나름대로 고집스런 취향이 있는데, 거의 종교적인 수준의 고집을 가진 분들도 적지 않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내 취향이라는 것이 좀 유별나서 그리 많은 동료를 가지지는 못한 듯 하다.

취향 1번은 출력에 대한 것이다. 나는 출력이 큰 제품을 좋아하지 않고 그 대신 능률이 좋은 시스템을 선호한다. 능률은 일정한 양의 에너지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음악소리로 바꾸느냐 하는 것인데, 스피커의 경우 SPL이라 하고, dB/W/m로 표시한다. 능률이 좋으면 출력은 아주 작아도 된다. 가격은 싸지고, 환경오염도 덜 하다.

취향 2번은 주파수 대역 폭에 대한 것이다. 나는 아주 낮은 저음, 아주 높은 고음이 음악의 전면에 앞서 나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중음, 사람 목소리 부분이다. 쿵쿵 울리는 저음, 스피커가 부르르 떠는 것은 선전에서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금방 싫증나는 소리이다. 상쾌하고 차랑차랑한 고음도 얼른 듣기에 기분좋지만, 역시 여러가지 음악을 오래 즐기는 데는 방해가 될 때가 많다. 아름다운 중음은 생각보다 아주 어려운 것이고 또 음악을 즐기는 데 필요불가결하다. 저음과 고음은 중역을 해치지 않고 그 아름다움을 도와주는 한도 내에서 필요한 만큼 나와 주면 족하다.

취향 3번. 원음 재생을 지향하지 않는다. 나는 디스크에 들어있는 음을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원래 녹음할 때 났던 그 소리와 똑 같이 리플레이 하려는 생각이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환상, 그럴 듯 하고 기분좋은 거짓말이다. 어차피 오디오는 진짜가 아니다... 금강산을 찍은 사진은 아무리 잘 찍어도 금강산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 나름의 사진예술일 수는 있지 않는가? 금강산을 직접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독자적인 경험의 세계를 가진 예술. 나는 오디오에서 진짜에 육박하는 사실감을 구하지 않고 진짜에서는 맛볼 수 없는 독자적인 예술성을 찾는다.

...여기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오디오매니어 주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 취향 4번이 결정적으로 나를 주류에서 갈라놓는 별난 부분이다...

취향 4번. 나는 내 방이 원래 녹음이 이루어졌던 장소로 탈바꿈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을 [Sound Stage] 라고 하는데, 현대적인 스테레오 장치나 멀티채널은 녹음이 이루어졌던 장소의 공간감을 정확하게 재현하기 때문에 눈을 감으면 방의 벽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녹음현장이 출현하는 마술을 부린다. 내가 내 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홀연히 라스칼라 대극장의 객석에 앉아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마술도 참 신기하고 재미있지만... 나는 그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음악가들이 내 방에 찾아오는 것이다 -- 내가 그들이 연주를 벌이는 무대로 찾아가는 게 아니라. 오케스트라가 내 방에 들어오면 상당히 비좁다. 그래도 괜찮다. 록 밴드가 내 방에서 연주를 하면 제법 시끄럽다. 그것도 괜찮다. 집주인인 내가 조절하면 된다. 조절해서, 좁은 방 안에서 오케스트라의 스케일과 록 밴드의 거칠은 박력을 "느낄" 수 있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음악가들이 내 방에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그들의 체취랄까 존재감을 내 방 안에서 느낄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I am there" 가 아니고 "they are here, in my room" 을 원한다는 얘기다.

오디오 매니어가 아닌 이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들이 솔직히 황당하고 뜻없는 X소리에 불과할 지 모르겠다. 아마 그럴 것이다. 대체로 어떤 취미든 매니어 -- 돌았다는 뜻이 아닌가 -- 라는 딱지가 붙기 시작하면 그런 법이다. 나는 SF와 판타지도 좋아하지만, 그 쪽으로 [매니어]인 분들이 만약 장르소설 잘 모르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SF나 판타지 이야기를 신명이 나서 늘어놓으면, 약하게는 좀 이상한 친구로군, 심하게는 별 미친 X 다 보겠네, 이런 대접을 받을 게 틀림없다....

2003/02/10 12:01 2003/02/10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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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하면 부자들의 도락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실지로 그런 면도 없진 않지만, 다음 글을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기 때문에...

나의 오디오 첫 걸음은 아마 국민학교 5학년때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러니까 70년대 말이 되겠다. 그때 한국의 오디오... 라기보다 음악을 즐기시던 분들의 사정이 어땠냐 하면...

소프트 쪽으로는 백판 (해적판 LP)과 역시 해적판 카세트 테입이 시장을 형성하고 한심한 수준이었지만 라이센스 LP가 조금씩 나오던 시절이었다. 하드웨어는 여전히 일제 장전축 (커다란 TV같이 생긴 가구풍의 물건인데 라디오 + 레코드플레이어)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월남에서 들어온 소형 카세트 녹음기가 돌아다니고 있었고... 물론 부잣집에 가면 미제 장전축이 있었고 갑부들은 독일제를 가지고 있었다. (집 창고에 혹시 독일제 장전축이 있다면 절대 버리지 말기를! 그거 뜯어서 부품으로만 팔아도...)

서민들에게는 금성에서 만든 테이블탑 형 라디오가 거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래도 조금 여유가 있는 분들이 역시 금성에서 만든 별표전축을 살 수 있었다. 이 별표전축이 가격 (미제나 일제의 반값도 안 되는 싼 가격)에 비해 성능이 좋아, 많은 사랑을 받았더랬다.

어린 학생들은 물론 이런 사치를 꿈도 꿀 수 없었고, 솔직히 "음악을 듣는게 취미다" 이런 아이디어 자체가 그 시절엔 희귀한 것이었다. 먹고 살기 바빴으니까. 국산품 카세트 라디오도 하나둘씩 보급되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독수리표 쉐이코 카세트라디오. 삼성에서도 하나 만들었는데 쉐이코의 인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당시 가격으로 무려 30,000원을 호가했으니까 가난한 학생들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그래서 그 시절엔 "음악을 들으러 친구집에 가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TV 보러도 많이 갔었지만...)

우리 집에는 다행히도 장전축이 하나 있었다 - 선친이 음악을 좋아하셨던 까닭에. 하지만 이걸로는 당시 미디어 컨텐츠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카세트 테입을 들을 수가 없었다. 부모님께 그런 걸 사달라고 조르는 짓은 자살행위였고, 궁리끝에 가장 돈이 안 드는 방법을 찾아 냈는데 그게 내 AUDIO 인생의 출발이었다.

그 방법이란 이거다: 방천시장이라고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을 헐값에 파는 무허가 상점들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부서진 (그러나 동작은 하는) 카세트 메카니즘을 구입한다. 2000원 정도 준 것 같다. (2000원이면 카세트테입이 무려 3개. 공립 국민학교 육성회비가 6000원 하던 시절이다. 거금이다...) 이 물건 - 카 스테레오 부서진 것이었는데 - 에서 음성출력을 따 내서는 장전축에 연결한다. 그 당시 장전축에는 외부입력을 받아들이는 단자 같은게 없었기 때문에 LP 플레이어에서 오는 신호선을 뜯어내고 거기다가 연결하는 것이다.

수 차례의 눈물어린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소리가 나왔다. 그 때의 희열이란... 그래서 처음으로 들었던 음악이 닐 영의 [Heart of Gold] 였다.

노래가 나오기 시작한 지 30초만에 할머니께서: "에에~ 시끄럽다!"

대중음악은 전혀 듣지 않으시던 아버지도: "이게 무신 쌍넘 재주넘는 음악이 나오노?"

참고로 쌍넘 재주넘는 음악이란 아버지 나름으로 Rock'n'Roll을 표현하신 것이다.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 쏘니에서 워크맨 (아.. 기억하는가 이 이름)을 발매한다 -- 모델명 FM1. 라디오도 안 나오고 녹음도 안되고 오직 플레이만 되는 카세트가 당시 가격으로 무려 150불, 한국에서는 사치품으로 분류되어 초창기에는 20만원이라는 대졸 초봉을 웃도는 가격에 팔렸더랬다. 우리 반에 갑부 아들내미 하나가 이걸 학교에 들고 와서는 어떻게나 자랑을 하는지... 확 밟아 부셔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 어떻게든 아양을 떨어서 그걸 한 번 들어봐야 하니까. 그 환상적인 음질 -- 아직도 미니카세트 좋아하는 분들은 이 FM1을 높게 평가한다.

내가 중학교 들어간 다음 삼성에서 마이마이를 출시한다. 10만원이 조금 안되는 가격에 팔렸다. 여전히 꿈의 가격이다. 나는 꿋꿋이 그 두들겨 붙인 장전축+카세트로 동네 레코드가게에서 녹음해 온 테입을 들었다. 할머니와 아버지 눈치를 보면서... 마이마이를 사기 위해서 신문팔이를 해 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꿈에 그리던 "나의" 카세트라디오를 갖게 된 것은 중3때였다. 눈물을 다 흘렸던 기억이 난다. 에로이카나 인켈이 나오기 시작하던 때였지만 그런 것들은 별세계 이야기였고, 테입을 말아먹지 않고 FM이 제대로 잡히는 삼성 카세트 라디오는 그 후 고등학교 1학년때까지 나의 보물 1호였다. 저음을 더 많이 내고싶어서 스피커 앞에 골판지로 나팔을 만들어 대었던 기억도 난다. (나의 첫 혼 스피커!)

"에이 그게 무슨 오디오야?" 그럼 뭐란 말인가? 나는 지금도 마음을 울리지 못하고 돈만 비싼 수퍼 하이엔드 보다는 음악을 듣고 싶은 마음에 어거지로 때워붙인 옛날의 그 별표전축이 더 우월하다고 믿는다. 거기서 비지직거리며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감동하고 즐거워 했으니까...

수도권에서 자란 분들은 내 얘기에 시대적인 혼란을 느낄 지도 모르겠는데... 지금도 좀 그렇지만, 그때만 해도 서울과 지방의 문화수준 차이는 엄청났었다. 서울살던 오촌 조카가 하나 있었는데 걔네 집은 아주 부자였다. 나보다 다섯 살 위의 고등학생이었는데 자기 방에 그 당시만 해도 구경하기조차 힘들었던 Marantz니 JBL 같은 외제 컴포넌트들을 셋업해 놓고 있었다. 거 정말 눈돌아가더구만.

2003/02/09 11:38 2003/02/09 11:38